시인의 시

맹문재 시 보기(9편)

시치 2010. 2. 15. 16:24

살생. 外 /맹문재


대지를 닮은 하늘과

하늘을 닮은 대지와

하늘과 대지를 닮은 영혼에게 물어보아야 한다는

살생의 계율이

방아쇠를 당긴 뒤 떠올랐지만, 미안하지 않았다

오히려 총을 내려놓지 않는 사냥꾼처럼

또 다른 순간을 기대했다


나는 손바닥을 적신 모기의 피로

별빛을 가렸다

남촌에서 불어오는 봄바람도 막았다


나의 살생 습관은

들일을 하면서 배운 것이 아니다

우물을 마시거나 장작을 패면서 체득한 것도 아니다

하늘과 대지와 영혼을 닮지 않은 배역을 맡으면서

길에 배신당하면서

쌓은 것이다


그러므로 피가 묻은 위안인데도

나는 거절하지 않는다

 

동행 

 

1


중학생 시절 친구가 등 뒤에서 떠밀어

눈 덮인 길가로 떨어졌는데

손을 잘못 짚는 바람에

나의 왼손 중지는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


신작로를 내느라고 깬 돌에 베여

부랴부랴 헝겊으로 동여맸는데……



2


지난여름 작은애가 미끄럼틀에서 손을 삐어

동네 정형외과에 데려갔다가

나의 왼손도 엑스레이를 찍어보았다


중지 끝에 돌이 들어 있다고 의사는 말했다


수술을 할 수 있느냐고 기도하듯 물어보자

신경에 붙어 있어 위험하네요, 같이 가야지요


함께할 수 없는 상대인데

함께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니



3


왼손 중지에 든 돌멩이가

나를 이끌어온 나침반이었구나


나를 싫어하는 사람에게 웃음을 띠고

나를 무시하는 사람에게 굽실거리고


나를 화내게 하는 세상에 거리를 두게 했구나

 

 비단개구리를 업다


나의 공격이 한순간에 끝날 것을 아는지

천둥이 쳐도 떨어질 수 없다는 것인지

등위에 올라탄 녀석도 아래에 깔린 녀석도

피하지 않는다 


오히려 화살처럼 내리꽂히는 나의 오줌 줄기를

내가 맞는다


나는 부끄러움이 들어 오줌 줄기를 틀고

논물처럼 차가운 비단개구리 한 마리를 업었다

 

카키색에 대한 편견


한 백일장 심사에서 최종 두 편을 읽다가

나는 카키색 앞에서 멈추었다

한 편은 놀라운 표현력을 가지고 있었고

다른 한 편은 밀도가 좀 떨어졌지만

카키색 작업복을 입은 부둣가의 아버지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배가 들어올 때마다 짐 내리는 일을 차지하기 위해

개떼처럼 몰려드는 카키색 작업복들


카키색 바닷물이 일렁였고

카키색 오후가 무능하게 흘렀고

카키색 담배연기가 무겁게 흩어졌다


시란 논의할 필요도 없이 아름다움이 있어야 하는데

나는 카키색 앞에서 망설인 것이다


카키색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라고

순정이 아니라 체력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나는 카키색에 대한 편견에 깜짝 놀랐지만

감출 것은 없어

두 편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마침내 신호등이 바뀌었다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는 동안

횡단보도로 그려진 하얀색 선을 

하나, 둘, 셋, 넷…… 세기 시작하다가

한 달, 두 달, 세 달, 네 달…… 세월로 세본다

한 살, 두 살, 세 살, 네 살…… 나이로도

할아버지, 아버지, 나, 아들…… 가계로도

만 원, 십만 원, 백만 원, 천만 원…… 월급으로도 세보는데

어느 순간 멈추게 되었다


시간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경험의 한계가 거울처럼 분명했기 때문이다


나는 열두 달 이상을 세지 못했고

예순 살에서는 힘이 빠졌고

천만 원에서는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출렁거리는 저 강물에 발목 적셔야 하는데……


마침내 신호등이 바뀌었다

 

모기 앞에서

 

   너에게 물러설 수 없다고 내가 자세를 취하는 것은

오랜 습관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모기 사냥꾼이라고 불릴 정도로

나의 습관은 물위에 뜬 기름같이 어설픈 것이지만

꿈속에서까지 두려워하며 쌓은 것이기에

그만둘 수가 없다

나는 이 습관을 만들도록 한 순간들을 잘 안다

그리하여 위엄 있는 자세가 못 된다고 할지라도

대적하고 있는 순간, 물러설 수가 없다

내가 너를 죽이고 일어선다고 하더라도

한 잔의 물을 마시듯 인생을 바꿀 수는 없겠지만

이 순간을 놓치면

나는 길모퉁이에서 엎어지는 것이다

너를 노려보고 있는 동안

태풍이 쳐도

단풍이 들어도

연체 이자의 독촉을 받아도 상관없다

습관을 쌓으려는 나의 고집을 버릴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언제까지 혁명의 책들을 골라올까?

 

나는 여전히 서점에서 혁명의 책들을 골라오지만

거의 읽지 않는다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에 재미를 들여서도

주식이나 부동산 투기에 몰두해서도 아니다

나는 화투에 중독된 노름꾼처럼 시간을 뒤적이느라

책을 읽지 않는 것이다

시간에 빠진 나는

시간을 보고 시간을 듣고 시간을 추종하느라 정신이 없다

오늘도 시간은 온화한 목소리로

잘못이 없더라도 용서하는 마음을 가지라고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림자만큼 제자리를 지키라고

불행을 예방주사처럼 맞으라고

내게 기도하듯 들려준다

나는 시간의 당부를 들을 때마다

역정조차 못 내는 진폐환자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내팽개친 책을 잡는다

그러나 시간의 얼굴은 호수보다 넓고 부드러워

또다시 포기하고 만다

칼끝처럼 서 있던 나의 고집은 어느새

배부른 아기처럼 잠드는 것이다


나는 언제까지 혁명의 책들을 골라올 것인가?

 

시집

 

“증말 저런 데 살아봤으면 소원이 읎겠네. 나는 글쎄 지하에 산다구.”


출근 버스를 기다리며 서 있는 내게

머리카락을 연탄재같이 날리며 다가온 할머니.


나는 얼굴을 쳐다볼 수가 없어

할머니가 가리키는 손짓을 따라 아파트들을 바라보다가

투르게네프의 「거지」를 중얼거렸다.


“용서하시오, 형제.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구려.”


동냥을 청하는 거지에게 주려고

호주머니며 지갑을 뒤졌지만

손수건마저 없었을 때 느꼈던 투르게네프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용서하세요, 할머니. 가진 것이 없네요.”

나는 말하지 못했다.


가방 속에는 시집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사과를 내밀다


 

1

마을의 골목을 돌아 나오는데

담장 가에 달려 있는 사과들이 불길처럼

나의 걸음을 붙잡았다


남의 물건에 손대는 행동이 나쁜 짓이라는 것을

나는 가난하기 때문에 잘 알고 있었지만

한번 어기고 싶었다


손닿을 수 있는 사과나무의 키며

담장으로 친 앙증한 꽃들도 유혹했다

 

2

콧노래를 부르며 골목을 나오는데

주인집의 방문이 열리지 않는가


나는 깜짝 놀라 얼른 사과를 허리 뒤로 감추었다


마루에 선 아가씨는 다 보았다는 듯

여유 있는 표정이었다


꼼짝없이 도둑놈이 되었구나……


  3


눈을 떴을 때, 다시 놀랐다


젖을 빠는 새끼를 내려다보는 어미 소 같은 눈길로 할머니는

사과를 깎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감추었던 사과를 내밀었다, 선물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