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치/김기택,이건청
멸치 / 김기택
굳어지기 전까지 저 딱딱한 것들은 물결이었다
파도와 해일이 쉬고 있는 바닷속
지느러미 물결 사이에 끼어
유유히 흘러다니던 무수한 갈래의 길이었다
그물이 물결 속에서 멸치들을 떼어냈던 것이다
햇빛의 꼿꼿한 직선들 틈에 끼이자마자
부드러운 물결은 팔딱거리다 길을 잃었을 것이다
바람과 햇볕이 달라붙어 물기를 빨아들이는 동안
바다의 무늬는 뼈다귀처럼 남아
멸치의 등과 지느러미 위에서 딱딱하게 굳어졌던 것이다
모래더미처럼 길거리에 쌓이고
건어물집의 푸석한 공기에 풀리다가
기름에 튀겨지고 접시에 담겨졌던 것이다
지금 젓가락 끝에 깍두기처럼 딱딱하게 집히는 이 멸치에는
두껍고 뻣뻣한 공기를 뚫고 흘러가는
바다가 있다 그 바다에는 아직도
지느러미가 있고 지느러미를 흔드는 물결이 있다
이 작은 물결이
지금도 멸치의 몸통을 뒤틀고 있는 이 작은 무늬가
파도를 만들고 해일을 부르고
고깃배를 부수고 그물을 찢었던 것이다
멸치 / 이건청
내가 멸치였을 때,
바다 속 다시마 숲을 스쳐 다니며
멸치 떼로 사는 것이 좋았다.
멸치 옆에 멸치, 그 옆에 또 멸치,
세상은 멸치로 이룬 우주였다.
바다 속을 헤엄쳐 다니며
붉은 산호, 치밀한 뿌리 속을 스미는
바다 속 노을을 보는 게 좋았었다.
내가 멸치였을 땐
은빛 비늘이 시리게 빛났었다.
파르르 꼬리를 치며
날쌔게 달리곤 하였다.
싱싱한 날들의 어느 한 끝에서
별이 되리라 믿었다.
핏빛 동백꽃이 되리라 믿었었다.
멸치가 그물에 걸려 뭍으로 올려지고,
끓는 물에 담겼다가
채반에 건저져 건조장에 놓이고
어느 날, 멸치는 말라 비틀어진 건어물로 쌓였다.
그리고, 멸치는 실존의 식탁에서
머리가 뜯긴 채 고추장에 찍히거나,
끓는 냄비 속에서 우려내진 채
쓰레기통에 버려졌다.
내가 멸치였을 때,
별이 되리라 믿었던 적이 있었다.
$$ 이건청 시인
1942년 경기 이천 출생 한양대학교 국문학과를 거쳐 같은 대학원에서 문학석사, 단국대학교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음, 1967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 시집에「이건청 시집」「목마른 자는 잠들고」「망초꽃 하나」「청동시대를 위하여」「하이에나」「코뿔소를 찾아서」「석탄형성에 관한 관찰 기록」「푸른말들에 대한 기억」「소금창고에서 sf아가는 노고지리」등, 연구서「문학개론」(공저)「나의 별에도 봄이오면」(윤동주 평전)「초월의 양식」「한국전원시 연구」「윤동주-신념의 길과 수난의 인간상」「해방후 한국 시인 연구」「한국 현대 시인 탐구」등의 저서가 있음. 녹원문학상·현대문학상·한국시협상 등을 수상, 현재 한양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로 재직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