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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무비스님의 直指〈59〉혜능(慧能)대사 ④‘도’란 상대적인 양변을 초월한 경지

시치 2009. 12. 14. 14:51

‘도’란 상대적인 양변을 초월한 경지

〈59〉혜능(慧能)대사 ④

 
 

簡曰弟子之 主上必問 願和尙 慈悲 指示心要 師曰道無明暗 明暗 是代謝之義 明明無盡 亦是有盡 簡曰明喩智慧 暗況煩惱 修道之人不以智惠 照破煩惱 無始生死 憑何出離 師云 若以智惠 照破煩惱者 此是二乘小兒 羊鹿車等機 上根大智悉不如是
 
簡曰如何是 大乘見解 師云 明與無明 其性無二 無二之性 卽是實相 實相者 處凡愚而不減 在賢聖而不增 住煩惱而不亂 居禪定而不寂不斷不常 不來不去 不在中間 及其內外 不生不滅 性相如如 常住不遷 名之曰道

 
 
설간이 말하였다.
 
“제자가 돌아가면 주상께서 반드시 물을 것이니 원컨대 화상께서는 자비로써 마음의 요점을 지시하여 주십시오.”
 
혜능스님이 말씀하였다.
 
“도란 밝고 어두움이 없다. 밝고 어두움이란 서로 뒤바뀌는 이치이다. 밝고 밝은 것은 다함이 없으며 또한 다함이 있는 것이니라.”
 
설간이 말하였다.
 
“밝음은 지혜에 비유하고 어두움은 번뇌에다 비유합니다. 도를 닦는 사람이 혹시 지혜로써 번뇌를 비추어 깨트리지 못하면 끝이 없는 생사를 무엇을 의지해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혜능스님이 말씀하였다.
 
“만약 지혜로써 번뇌를 비추어 깨트리는 사람은 이것은 이승들의 어린아이인 양이나 사슴이 끄는 수레인지라 상근기인 큰 지혜의 사람들은 모두 이와 같이 않느니라.”
 
설간이 물었다.
 
“어떤 것이 대승의 견해입니까?”
 
혜능스님이 말씀하였다.
 
“밝음과 어두움은 그 성품이 둘이 없다. 둘이 없는 그 성품이 곧 진실한 모습이다. 진실한 모습이란 범부로서 어리석은 입장에 있더라도 감소하지 않으며 현자나 성자의 입장에 있더라도 더 불어나지 않는다. 번뇌 속에 머물더라도 어지럽지 않으며 선정에 머물더라도 고요하지 않다. 아주 없어져버리는 것도 아니며 늘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오는 것도 아니며 가는 것도 아니다. 중간에 있는 것도 아니며 안이나 밖에 있는 것도 아니다. 생기거나 소멸하는 것이 아니며 성과 상이 여여(如如)하여 항상 그 자리에서 옮기지 않는 것을 이름 하여 도라고 한다.”
 
 
진정한 밝음은 상대적인 관계를
 
초월하면서 양변을 수용하는 것
 
 
해설 : 도란 상대적인 양변을 초월한 경지다. 그것을 흔히 중도라고 한다. 깨달음이나 지혜를 말할 때 어두움과 밝음으로 비유되지만 어두움과 밝음으로 비유되는 그와 같은 밝음은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진정한 밝음, 초월적 밝음이라 할 수 없다. 진정한 밝음은 상대적 관계를 초월하면서 상대적인 양변을 모두 수용하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법당이 어두워서 불을 밝혔을 때 그 때의 밝음은 진정한 밝음이 아니다. 법당이라는 공간은 밝음도 아니고 어두움도 아니다. 외적 조건이 밝으면 밝기도 하고 외적 조건이 어두우면 어둡기도 하다. 그러나 본래 법당의 참 모습은 밝든 어둡든 아무런 관계가 없이 그 공간은 그대로이다. 해가 떠서 밝으면 밝음을 수용하고 해가 져서 어두우면 어두움을 수용한다. 밝을 때든 어두울 때든 그 법당은 그 의미와 가치를 늘 가지고 있어서 아무런 변함이 없다. 이 변함없는 사실이 진정한 밝음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밝음은 밝다고도 할 수 없고 어둡다고도 할 수 없다.
 
지혜로써 번뇌의 어두움을 깨트려서 밝음을 찾았다는 것은 임시방편이요, 영원한 진실은 아니다. 일반적인 불교의 교의는 모두 지혜로써 번뇌를 몰아낸다고 가르치지만 6조스님은 다르다. 사람 사람들이 본래로 갖추고 있는 최상승의 지혜와 실상을 드러내 보인다. 그러므로 실다운 모습(實相)이란 범부의 경우든 성인의 경우든 언제나 부증불감이며, 번뇌에 있든 선정에 있든 아무런 상관이 없다. 아주 없는 것(斷)도 아니고 그렇다고 항상 있는 것도 아니다. 옴도 아니고 감도 아니며 중간이나 안팎도 아니다. 그러므로 참선을 하거나 6바라밀을 닦아서 얻어지는 것도 아니다. 본래로 여여한 그 모습 그대로다. 이것이 진정한 도다.

출처 : 염화실
글쓴이 : 文殊法供養會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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