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무비스님의 直指〈57〉혜능(慧能)대사 ② 천자가 궁중으로 초대해도 가지 않다
천자가 궁중으로 초대해도 가지 않다〈57〉혜능(慧能)대사 ② |
中宗 神龍元年 降詔云 朕 請安秀二師 宮中供養 万機之暇 每究一乘 二師 推云 南方有能禪師 密受忍大師衣法 可就彼問今遣內侍薛簡馳詔迎請 願師慈念 速赴上京 師 上表辭疾 願終林下
중종이 신룡 원년에 조칙을 내렸다. “짐이 혜안과 신수 두 대사를 청하여 궁중에서 공양하고 나라의 일을 보는 여가에 일승법을 공부하는데 두 대사가 다 같이 추천하였습니다. ‘남방에 혜능선사가 있어서 홍인 대사의 가사와 법을 남몰래 전해 받았으니 그분에게 나아가서 묻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내시 설간이라는 사람을 보내서 조서로써 청하여 영접하려하니 원컨대 대사께서는 자비로 생각하시어 빨리 상경하소서”라고 하였다. 혜능선사는 표를 올려 병을 핑계로 사양하고 숲속에서 살기를 원하였다.
그 같은 일을 달갑지 않게 생각 출가수행자의 고결한 정신 보여
해설 : 천자가 조칙을 내려 궁중으로 청하였으나 혜능스님은 나아가지 않았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그 인격이 훌륭하여 나라에서 천자가 받들어 모시고자 청함을 받았다면 당시의 사회적인 분위기와 천자의 권위로 볼 때 매우 경사스럽고 자랑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참으로 훌륭한 수행자들은 그와 같은 일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귀찮고 하찮은 일로 여긴다. 그러나 당시 선불교에 쌍벽을 이루었던 신수(神秀, ?~706)대사는 측천무후와 중종과 예종의 예우를 받아 삼제(三帝)의 국사가 되었고, 중서령(中書令) 장설(張說)은 그의 제자가 되었으며 나중에 신수 대사의 비문을 쓰기도 하였다.
혜능스님의 법을 계승한 남양혜충(南陽慧忠, ?~775)국사는 남양의 백애산 당자곡에 들어가 40여년을 산문 밖으로 내려가지 않으면서 수행에만 몰두하였기 때문에 당나라 숙종임금의 귀의를 받았다. 숙종은 세 번이나 궁중으로 청하였으나 한 번도 내려가지 않았다. 그래서 숙종은 더욱 더 스님들을 존경하고 불교를 높이 받들었다.
뒷날 이 일에 깊은 감동을 받은 스님이 있었다. 그 스님은 어떤 절의 주지로 와 달라는 초청을 받고 슬프고 분통이 터져서 글을 한편 남겼는데 강원의 교과서에 실려 있다.
고경(古鏡)화상이 분양의 태수에게 보낸 편지다.
“남양 혜충 국사는 천자가 세 번이나 초청하였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 그래서 숙종임금으로 하여금 부처님과 조사님들을 더욱 존중하게 하였다. 그러나 나를 남양 혜충 국사에 견준다면 하늘과 땅 차이다. 옛 사람을 생각해보니 부끄러움에 땀이 비오듯 한다.
어찌하여 분양의 태수는 나를 진흙과 같이 보아서 장난삼아 옥봉사라는 절을 지어놓고 편지 한 장을 달랑 보내어 와서 주지나 하기를 청하는가? 어찌 이 일신을 위하여 불교의 문중이 오물을 뒤집어 쓰도록 할 수 있단 말인가? 만고에 흐르는 장강의 물로도 이 더러운 이름을 씻을 수 없구나. 삼가 편지 한 장을 올리니 그 뜻을 받아주시고 나를 저 자유로운 원숭이나 새들처럼 놓아주어 구름 덮인 산에서 그 운치나 즐기게 하십시오. 그 은혜 갚을 날이 없을 듯하여 조석으로 향이나 한줄기 피우리다”라고 하였다.
혜능스님은 병을 핑계로 숲속에서 살다 죽을 수 있도록 하여 달라고 사양하였다. 얼마나 고결하고 아름다운 모범인가. 출가수행자의 그 고결한 정신은 모름지기 혜능스님과 같고 혜충 국사와 같고 고경 화상과 같아야 하거늘 어찌하여 오늘날의 우리 불교의 출가수행자들은 그렇지 못한가? 참으로 부끄럽고 애석한 일이다.
불교를 세상에 널리 전파하여 부처님의 훌륭한 사상으로 사람들을 교화하는 일에는 우리나라의 원효스님처럼 몸소 세상에 뛰어들어서 전법을 하는 포교활동도 중요하지만 한편으로는 불교의 특별한 장점인 철저한 자기 수행의 모습을 보여주는 일이다. 옛 사람들에게는 철저한 자기수행으로써 부처님의 사상을 전하는 것으로 삼은 사례가 훨씬 더 많았다. 수행자들은 깊이 생각할 문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