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인상. 추천,당선작

[스크랩] 《애지》2009년 가을 신인상 당선작_임봄

시치 2009. 12. 12. 21:33

《애지》2009년 가을 신인상 당선작

 

언제나 배가 고픈 (외 2편)

   임 봄

 

 

 

지하철 계단을 오르며 생각했어요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

이름을 불리지 못했기에

무엇도 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요

그래서 계단 하고 불러주었지요

그랬더니 오른쪽 끝에서

날개 하나가 삐죽이 솟는 거예요

내가 너무 작게 불렀나요 ?

조금 더 크게 불러줄 걸 그랬나요 ?

 

어제는 얼음이 든 쥬스를 마시는데

첫눈이 오고 앵두들이 빨갛게 익었어요

첫눈이 녹고 앵두들이 떨어지고

그녀가 울었어요

내가 첫눈 하고 부르자

첫눈에서는 하얀 양파꽃이 피어났는데요

조금 더 크게 불러줄 걸 그랬나요 ?

 

언제나 배가 고파서

굳게 닫힌 문들을 뜯어먹고 싶었어요

후식으로 반짝이는 문고리도

먹어치우고 싶었지요

그녀의 네모진 방에 직각들이 부풀어 오르면

시계 초침은 왜 그리 초조해 하던지요

조금 더 크게 불러줄 걸 그랬나요 ?

그랬다면 내 관자놀이에서

사과들이 둥글게 커졌을텐데요

 

 

조금씩 점점 빠르게

 

 

 

   나는 고양이, 담쟁이 넝쿨 수북한 담장 위에서 휘휘 휘파람을 불어요. 세상은 정지되고 나는 로프 없이 번지점프를 해요. 말귀를 못 알아듣는 개미들이 서로 꽁무니를 물어뜯어요. 일렬로 늘어선 슬픔이 느리게 행진할 때도 당신의 구두는 명랑한 스타카토로 달리는군요. 별들은 탄력 있게 울고 망고 주스에서는 바다냄새가 나요. 나는 식탁 밑으로 숨고 숫자 속으로 가라앉고 당신의 편두통 안으로 기어들어요, 감쪽같이. 수학 공식에 숨은 풍경 속에서도 배꼽이 단단해지는 비밀을 알면서 다시는 고향에 갈 수 없었지요. 고독을 들키려고 내장을 다 드러낼 필요는 없어요. 나는 길게 히히 웃고 야옹 하고 짧게 울었지요. 태양의 흑점에서 날개를 접은 나비가 다시 날지 못한다 해도 그건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나는요, 말아 올린 꼬리에서 뿌리가 내려 넝쿨로 스미고, 스미고, 스며요. 점점 빠르게 나는 어쩌면 날개가 돋을지도 모르지요. 아, 전에 이미 말했던가요

 

 

모로코

 

 

 

구태여 당신을 추억해야 한다면

난 여행을 떠날 거야

우기 지난 모로코에 가면 와디를 따라

낙타를 타고 모래언덕을 넘을 거야

 

백조 한 마리가 우물로 내려오면

나는 슬픔을 참느라 길게 늘어난 목에

오래 입을 맞추어야지

 

춤을 출거야, 태양의 흑점 한가운데서

가볍게 뛰며 경쾌한 왈츠를 추어야지

모로코 하고 읊조릴 때 흐르는 음률을

낮은음자리표로 붉은 카펫에 그려 넣을 거야

 

카사블랑카에 들르면

집을 잃은 군인과 술집 여가수의 이야기가

비처럼 흐르는 영화를 볼 거야

키스신 뒤쪽으로 폭죽이 터질 거야

잘 익은 포도주는 거리에 흥건히 엎질러질 거야

아, 나는 철없이 취할 거야

 

그곳에 가면 푸른 수염을 기른

당신을 만날 수 있을까

어쩌면 나보다 먼저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당신은 이미 늙어 있을 거야

오래 전 당신의 외투 주머니에서 끄집어낸

낙타의 발자국들이 푸르게 피고 있을지도

 

-----------------

* 임 봄(본명:임효선) / 1970년 대구 출생.

출처 : 푸른 시의 방
글쓴이 : 강인한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