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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무비스님의 直指〈49〉제29조 혜가(慧可) 대사 ③-“밖으로 모든 인연을 쉬어라”

시치 2009. 12. 11. 00:18

“밖으로 모든 인연을 쉬어라”

〈49〉제29조 혜가(慧可) 대사 ③

 
 

達磨一日 爲可大師 曰汝但外息諸緣 內心無喘 心如墻壁 可以入道 可 作種種說心說性 皆不契 一日忽悟 乃曰我已息諸緣 祖曰莫成斷滅不 可曰無 祖曰子作生 可曰明明不昧 了了常知故 言之不可及 祖曰此是諸佛諸祖 所傳心體 更勿疑矣

 
 
달마대사가 어느 날 혜가대사를 위하여 말씀하였다.
 
“그대는 다만 밖으로는 모든 인연을 쉬고 안으로는 마음에 헐떡거림이 없어서 마음이 장벽과 같아야 가히 도에 들어갈 수 있느니라.”
 
혜가가 갖가지로 궁리한 끝에 마음을 설명하고 성품을 설명하였으나 모두 계합하지 못하다가 어느 날 홀연히 깨닫고는 말하였다.
 
 
안으로는 헐떡거림이 없어
 
마음이 장벽과 같아야 한다
 
 
“저는 이미 모든 인연을 쉬었습니다.”
 
조사가 말하기를,
 
“단멸을 이루지 않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대는 지금 어떤가?”
 
“밝고 밝아서 어둡지 않으며 분명하고 분명하여 항상 알고 있기 때문에 말로서는 어떻게 표현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모든 부처님과 모든 조사의 전한 마음의 자체니라. 다시는 의심하지 말라.”
 
 
해설 : 달마대사가 제자 혜가에게 도에 들어가는 방법을 가르친 대목이다. 싯다르타 태자가 세상에서 가장 큰 영광인 태자의 지위를 버리고 출가하여 도에 들어가는 길을 찾아서 나섰다. 처음에 알라라 칼라마라는 스승을 찾았고, 다음으로 웃다카 라마풋타라는 스승을 찾았다. 그러나 그들은 도에 들어가는 길을 제대로 제시하지 못하였다. 6년이 다 된 어느 날 보리수나무 밑에 앉아 스스로 바른 사유에 들어 존재의 실상을 깨달았다. 그로부터 불교가 시작된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는 도에 들어가는 길을 찾아 도를 깨달아서 도의 삶을 살자는데 있다.
 
그래서 2700여 년 동안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구도자들이 도에 들어가는 바른 길을 찾아 인생을 송두리째 바쳐왔다. 혜가도 또한 도에 들어가는 길을 찾아서 달마대사를 찾아왔기 때문에 달마대사는 날을 택하여 혜가에게 도에 들어가는 바른 길을 일러주었던 것이다.
 
말씀은 간단했다. 사람의 삶이란 안과 밖으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 밖으로는 모든 인연을 쉬어버리라는 것이다. 그것이 가장 중요한 수행이다. 수행자로서 도를 닦는다고 하면서 그동안 살아 온 삶의 방식대로 이런 저런 속된 인연들을 끊지 못하거나, 안.이.비.설.신.의의 유혹에 이끌려서 여기저기를 기웃거린다면 그는 이미 도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다. 속인이다.
 
고인의 말씀에, “가진 것이란 한 가지의 옷과 한 가지의 발우로서 살라. 그래서 사람의 감정을 송두리째 끊어버리고 주리거나 배가 부르거나 무심하게 산다면 도는 저절로 높아지리라(一衣一鉢絶人情 饑飽無心道自高)”라고 하지 않던가. 바깥 인연을 제대로 끊고 사는가? 그렇지 못한가? 가 수행자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정확한 잣대가 된다. 이러한 생활이 곧 도라는 것은 아니지만 도에 들어가는 바른 방편임에는 틀림이 없기 때문이다.
 
둘째는 “안으로 마음에 헐떡거림이 없어서 마음이 장벽과 같아야 한다”고 하였다. 헐떡거림이란 도를 구하기 위해서 이런 저런 생각으로 치구하는 마음 씀씀이를 뜻한다. 도를 구하는 사람으로서 그 구하는 마음이 없으면 어떻게 도를 구할 수 있겠는가라는 생각을 할 수 있겠으나, 도를 구하는 그 소중한 마음마저 내려놓아야 한다는 뜻이다. 도를 구하는데 그 구하는 마음으로 출발하지만 필경에는 그 구하는 마음이 장애가 되어 도와는 멀어지게 된다. 이것은 최후의 방편이다. 처음에는 열심히 구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고 다음에는 그 마음마저 내려놓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도를 구하고자 하는 사람으로서 안과 밖으로 이와 같은 상태가 되었다면 그 경지가 어떻겠는가? 물의 온도가 찬지 더운지에 대해서는 물을 마셔본 사람만이 스스로 알 것이다. 
 
무비스님 / 조계종 전 교육원장
 
 
[불교신문 2540호/ 7월11일자]

출처 : 염화실
글쓴이 : 文殊法供養會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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