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소금 (외4편) / 이건청
소금 (외4편)
이건청
폭양 아래서 마르고 말라, 딱딱한 소금이 되고 싶던 때가 있었다. 세상에서 제일, 쓰고 짠 것이 되어 마대 자루에 담기고 싶던 때가 있었다. 한 손 고등어 뱃속에 염장질려 저물녘 노을 비낀 산굽이를 따라가고 싶던 때도 있었다. 형형한 두 개 눈동자로 남아 상한 날들 위에 뿌려지고 싶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 나는 이 딱딱한 결정을 버리고 싶다. 해안가 함초 숲을 지나, 유인도 무인도를 모두 버리고, 수평선이 되어 결리고 싶다. 이 마대 자루를 버리고, 다시 물이 되어 출렁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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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류
거기 나무가 있었네.
노을 속엔
언제나 기러기가 살았네.
붉은 노을이 금관악기 소리로 퍼지면
거기 나무를 세워두고
집으로 돌아오곤 했었네.
쏟아져 내리는 은하수 하늘 아래
창문을 열고 바라보았네.
거기 나무가 있었네.
희미한 하류로
머리를 두고 잠이 들었네.
나무가 아이의 잠자리를 찾아와
가슴을 다독여 주고 돌아가곤 했었네.
거기 나무가 있었네.
일만 마리 매미 소리로
그늘을 만들어 주었네.
모든 대답이 거기 있었네.
그늘은 백사장이고 시냇물이었으며
삘기풀이고 뜸부기 알이었네.
거기 나무가 있었네.
이제는 무너져 흩어져 버렸지만
둥치마저 타 버려 재가 돼 버렸지만
금관악기 소리로 퍼지던 노을
스쳐가는 늦기러기 몇 마리 있으리.
귀 기울이고 다가서 보네.
까마득한 하류에 나무가 있었네.
거기 나무가 있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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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암에서
눈발이 흩날리고 있었다.
부산발 강릉행 열차가
몇 사람을 내려놓고
떠나고, 택시들이 내린 사람들을 싣고
외지로 달려갔다.
그리고 철암은 석탄만 남았다.
검은 벼랑들만 남아 오후 5시 쪽으로
흐르는 것 같았다.
규폐(硅肺)를 앓는 것 같았다.
기침을 하면서
파싹 마른 사내가 사라지고 있었다.
뢴트겐 필름처럼
왼쪽이 하이얗게 번져 있었다.
눈발 속에 혈흔이 섞이고 있었다.
검은 새 한 마리 울고 가고
다시 검은 새 한 마리 울러 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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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
황야였다.
간이역 목조 의자에 아버지와 딸이 앉아 있었다.
기차를 세우기 위해
아버지가 수동의 시그널을 내렸다.
작은 등짐을 진 딸이 말했다.
꼭, 정식 결혼식을 올릴게요.
그래, 거기도 잡혀온 랍비 한 사람쯤은 있겠지.
아버지가 말했다.
멀리 연기를 뿜으며
기차가 오고 있었다.
딸이 가난한 아버지를 끌어안았다.
건강하세요. 딸이 말했다.
기차가 오고 있었다.
사이베리아, 유형지에 갇힌 사내 찾아가는
딸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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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무는 날이 다가와
말이 한 마리 쓰러지고 있다.
뒷무릎이 꺾이고 서서히
앞다리를 치켜들고 있었다.
긴 목을 흔들고 있었다.
재갈이 물려 있었다.
갈기가 좌우로 흔들리고 있었다.
다급하게 울고 있었다.
하반신이 무너지고 있었다.
서서히 뒷무릎이 꺾이고
잠시 후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핏빛 노을이 걸리고, 적막한
들판이 하나 엎드려 있었다.
저물녘이었다. 말이 한 마리
쓰러지고 있었다. 뒷무릎이 꺾이고
서서히
앞다리를 치켜들고 있었다.
—이건청 시선집 『움직이는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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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청 / 1942년 경기 이천 출생. 1967년 〈한국일보〉신춘문예 가작 입선, 1970년 《현대문학》추천으로 등단. 시집 『이건청 시집』『목마른 자는 잠들고』『망초꽃 하나』『하이에나』『코뿔소를 찾아서』『석탄 형성에 관한 관찰 기록』『푸른 말들에 관한 기억』『소금창고에서 날아가는 노고지리』. 시선집 『움직이는 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