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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작품상 추천작을 읽고-쌍가락지/김명인

시치 2009. 10. 16. 22:22

현대시작품상 추천작을 읽고-김명인  

쌍가락지/김명인

 

 

그가 거두는 약속일까, 서쪽까지 걸어간 해가

어느새 테두리를 이울며 지고 있다

가운데를 뻥 뚫어 주홍빛 살결로 채운

가락지, 한 짝을 어느 하늘에서 잃어버렸을까

빛살을 펼쳐들고 수평선 아래로 잠겨든다

 

한 번도 디딘 적이 없는 저기 허구렁에

그가 뿌려놓은 또 다른 내일이 있다는 것일까

벙글어진 하늘의 목화밭

목화 따러 간 사람들은 돌아오지 않았는데

붉은 병을 던진 듯 활활활 송이송이 불타고 있다

 

나는, 솟아나고 가라앉으며 12억 광년 먼 회로를 따라

약속에 이끌려서 여기까지 왔다

억만년 전에 찢겨버린 흰 구름

푸른 물결로 떠밀리면서

이 모래밭에 착근하려던 한 알갱이 모래,

모든 소멸은 일몰로 간다, 다시 내장되거나

캄캄하게 태어나는 빛!

 

헤어지지 말아요!

해의 누이 달이 속삭이는 소리

약속을, 동쪽 끝에 걸어두었는데 어느새

혈육으로도 깁지 못하는 저녁이 왔다

이 절망은 테두리뿐인 가락지처럼 속이 환하다!

 

― ‘시인세계’  2009 가을호

 

 

 

소멸과 불멸의 경계에서 체험하는 영혼의 현상학 /김 륭

 

                                                                                           

 

                        나는 세계에 몸을 열고, 세계도 내게 몸을 연 것이다. ―가스통 바슐라르

 

 

  바슐라르가 문학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는 것은 그의 상상력 이론 때문이다. 그가 내세운 상상력 이론의 본질은 인간의 삶은 끊임없이 능동적으로 새로운 변화를 만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상상력은 외계 그 어떤 대상들의 이미지라도 그것을 상상 가운데 언제나 어느 원형으로 역동적으로 변화시켜 나아간다. 이때 원형은 이를테면 상상력이 이상으로 여기는 상태다. 따라서 상상력은 그 이미지를 원형에 이르게 할 때 가장 큰 희열을 느끼게 되며, 그 희열이 바로 흔히 감동이라고 말하는 심미적 체험이다. 이 감동의 체험을 바슐라르는 ‘혼의 울림’이라고 말한다.

 

  김명인의 미학은 생의 근원적인 허무와 비애에 바슐라르의 상상력을 자연스럽게 불러 앉힌다는데 있다. 이를테면 바슐라르의 아포리즘<‘나는 세계에 몸을 열고, 세계도 내게 몸을 연 것이다.’>은 김명인의 시편들을 통해 명징해지며 구체화된다. 시가 정신의 형이상학이라기보다 ‘영혼의 현상학’이라는 명제에 ‘시의 몸’을 얹어두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영혼에 얹어둔 ‘시의 몸’이다. 우리가 김명인을 읽을 때 간과해서는 안 될 텍스트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어느 평자는 “고통스러운 내면의 어둠에 함몰되거나 주저앉지 않고 삶과 죽음의 문제를 온몸으로 부닥치면서 허무와 극복이라는 감정의 양 극단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낸다. 그리고 이 균형감각 위에서 초월적인 무욕의 아름다움을 건져낸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초월적인 무욕의 아름다움은 무엇일까? 시적으로 말한다면 소멸과 불멸의 경계에서 구체화된 영혼의 ‘쌍가락지’같은 건 아닐까. 김명인에게 시간은 추억이란 이름으로 부르는 존재의 잔상, 나아가 절망 혹은 죽음의 속살이며 그것은 곧 바슐라르가 말한 ‘혼의 울림’으로 공명한다.

 

  가운데를 뻥 뚫어 주홍빛 살결로 채운/가락지, 한 짝을 어느 하늘에서 잃어버렸을까

 

  다시 말해 김명인의 미학은 소멸과 불멸의 경계에서 해와 달처럼 빛을 발하며 그의 최근작「쌍가락지」는 초월적인 영역에서 나아가 우리 삶이 ‘절망’을 넘어서 세계를 끌어안는 장엄함의 한 단면이다. 따라서 그가 허무와 극복이라는 양 극단 사이에서 건져낸 초월적인 무욕의 아름다움은 “뻥 뚫어 주홍빛 살결로 채운” 욕망의 테두리이자 동시에 절망의 테두리인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그가 영혼에 얹어둔 ‘시의 몸’이 존재론적 사유의 깊이로 극복될 때 우리는 소멸과 불멸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묘한 희열을 맛보게 된다. 이때 희열은 그 어떤 시적 대상이 우리 몸 깊숙이 잠재된 에로스적 욕망까지 둥글게 껴안은 심미적 체험이다. 물론 그의 시편을 통해 에로스적 욕망을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서 에로스적 욕망의 한계는 절망이 아니라 소멸이라고 가정한다면 그가 이번 시편을 통해 보여주는 역설적 생명력은 불멸과도 궤를 같이 하게 되며 육체가 가진 현실의 한계는 극복된다. 이처럼 그의 세계는 아름다움이나 생명력과 같은 에로스적 욕망의 보이지 않는 세목까지 새롭게 태어나며, 그 새로움은 김명인이라는 텍스트를 빌리지 않으면 표현할 수 없는 장엄함이다.

 

  한 번도 디딘 적이 없는 저기 허구렁에/그가 부려놓은 또 다른 내일이 있다는 것일까

 

  생의 근원적인 허무와 비애 앞에 남루하기 짝이 없는 우리의 삶은 김명인의 시적언술을 거치면 서정의 물질성을 껴안은 깊은 사유로 변한다. 1979년 발간된 『동두천』을 시작으로 근저 『파문』까지, 송재학 시인의 말처럼 ‘사물의 천품’이 읽히는 그의 시편들은 한마디로 경이롭다. “우리에게 장례 말고 더 큰 축제가 일찍이 있었던가”(「바닷가의 장례」)라고 물었던 것처럼…, 김명인에게 시 쓰기가 고통이라면 그의 시편들을 읽는 우리는 축복이다. 그리고 지금,

 

  벙글어진 하늘의 목화밭/목화 따러 간 사람들은 돌아오지 않았는데/붉은 병을 던진 듯 활활활 송이송이 불타고 있다 …(중략)…

 

  모든 소멸은 일몰로 간다, 다시 내장되거나/캄캄하게 태어나는 빛!

 

  「쌍가락지」는 그의 의식을 오랫동안 지배하던 바다의 견인력을 바탕으로 세계관이 더욱 깊고 새롭게 진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의 시선은 분명 이동중이다. “수평을 둥글게 껴안고 넘어가는/꽃수레에서 수만 꽃송이들이 한번 활짝 피었다가 지는”(「다시 바닷가의 장례」) 소멸의 순간이 「쌍가락지」에서는 “붉은 병을 던진 듯 활활활 송이송이 불타고 있다”로 한층 폭발적(?)으로 변했다. 불멸을 꿈꿀 수 없는 삶의 내면을 도려낸 역설의 세계여서 더욱 아프고 그만큼 장엄한 것은 아닐까. 문학평론가 이숭원이 그의 여덟 번째 시집 『파문』 해설에서 밝혔듯이 개성적 비유와 정밀한 묘사가 존재론적 사유와 깊게 어우러져 삶의 나이테와 그 나이테에 감추어진 그림자를 하나의 화폭 안에 잔상처럼 펼쳐내는 독특한 표현 미학은 단순한 수사학이 아니라 언어로서 뱉어낼 수 없는 존재의 내면과 심연으로부터 길어 올린 것이다. 이는 「쌍가락지」 속의 해와 달이며, 그것은 세계에 몸을 연 김명인에게 세계가 몸을 열어 선물한 이를테면 절망으로도 마르지 않는 우물이며, 우주의 목소리다.

 

  헤어지지 말아요!/해의 누이 달이 속삭이는 소리/약속을, 동쪽 끝에 걸어두었는데 어느새/혈육으로도 깊지 못하는 저녁이 왔다

 

  소멸의 한순간을 그 누구보다 아름답게 해독해낸 그의 눈을 통해 우리는 감히 그 무엇으로도 위로받지 못하는 슬픔이나 아픔 그 막막함의 황홀경을 읽는다. 결국 “끝없는 영원”은 “열려다 다시 주저앉는다”(「다시 바닷가의 장례」)던 시인은 이번 「쌍가락지」를 통해 절망과 몸을 섞은 경험과 통찰로 얻은 삶을 감싸 우주 바깥으로 밀고나가려는 의지를 보인다. 그렇다. “이 절망은 테두리뿐인 가락지처럼 속이 환하다!” 우리는 그의 시편을 통해 소멸 혹은 절망의 아름다움과 장엄함이 삶의 통속적인 비통함을 넘어선다는 것을 다시 확인하는 것이다.

 

 

  <현대시 2009. 10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