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시

[스크랩] 유홍준 < 상가에 모인 구두들 외 9 편 >

시치 2009. 10. 2. 17:08

           喪家에 모인 구두들

                                 - 유홍준

 

  저녁 喪家에 구두들이 모인다

  아무리 단정히 벗어놓아도

  문상을 하고 나면 흐트러져 있는 신발들

  젠장, 구두가 구두를

  짓밟는 게 삶이다

  밟히지 않는 건 亡者의 신발뿐이다

  정리가 되지 않는 喪家의 구두들이여

  저건 네 구두고

  저건 네 슬리퍼야

  돼지고기 삶는 마당 가에

  어울리지 않는 화환 몇 개 세워놓고

  봉투 받아라 봉투,

  화투짝처럼 배를 까뒤집는 구두들

  밤 깊어 헐렁한 구두 하나 아무렇게나 꿰 신고

  담당 가에 가서 오줌을 누면, 보인다

  北天 에 새로 생긴 신발자리 별 몇 개

 

                    저울의 귀환

 

쇠고기 한 근을 샀다

하얀 목장답 낀 정육점 여자의 손이

손에 익은 한 근의 무게를 베어 저울 위에 얹었다

주검의 일부를 받아안은

저울 바늘이

부르르 진저리를 쳤다 저울이

내게 물었다 인간들의 약속이란 고작

이 한근의 무게가 모자란다고 보태거나 넘친다고 떼

어 내는 것?

맞아 저쪽 봉우리에서 더 먼 저쪽 봉우리로

주먹만한 고깃덩어리들이 고단한 날개를 저어가는 황

혼 녘

국거리 쇠고기 한 근 담아 들고

부스럭대는 비닐봉지 흔들며 늙은 어머니를 찾아가면

저울을 떨게 만든 이 한 뭉텅이 주검의 무게가

왜 이렇게 가벼운가 문득

저울대가 된 나의 팔이여

모든 것을 들어냈을 때 비로소 평안을 얻는

빈 저울의 침묵이여 나는 제로에서 출발한 커다란 고

깃덩어리

주검을 다는 저울 위에 올라가 보고서야 겨우

제 몸 뚱어리 무게를 아는 백 열 근짜리

사지 덜렁거리는 인육

 

                계단

 

계단 아래

꽃밭 있다 거기

허튼 꽃 목숨들 살다가 진다 계단처럼 죽음이

차곡차곡 쌓인다 나는 본다 모든 주검은 계단처럼 빳빳하다

죽음이란, 구부러지지 않는 무릎으로

계단을 올라가는 것

세상의 마지막 계단 나는

너의 발 아래

맨가슴을 디민다 등짝을 디민다

당신의 발은 나의 머리보다 위에 있다

인조대리석 차가운

몸 위에

누군가 새로운 육신을 쌓고 또 쌓길 바라는 나는

계단 아래 계단이다

꽃의 소멸도 계단이 진다, 라고 읽는 계단이다

 

(*당신의 발은 나의 머리 위에 있다, 티베트 속담)

 

               해변의 발자국

 

얼마나 무거운 남자가 지나갔는지
발자국이, 항문처럼
깊다
 
모래 괄약근이 발자국을 죄고 있다
모래 위의 발자국이 똥구멍처럼, 오므려져 있다
 
바다가 긴 혓바닥을 내밀고
그 남자의
괄약근을 핥는다
누가 바닥에 갈매기 문양이 새겨진 신발을 신고 지나갔을까?
 
나는 익사자의 운동화를 툭, 걷어찬다
갈매기가 기겁을 하고 날아오른다

 

                 北 天

 

구름같은 까마귀떼 저 하늘을 쪼았다 뱉는다 하늘밖에 더 뜯어먹을 게 없는

 

눈뜨지 마라 파먹을라 동안거에 들어간 하늘의 얼굴이 산비탈처럼 말랐다 두 볼에 골짜기가 패었다 하늘 눈(目)에서 피가 흐른다 서산마루를 타고 흘러내린다

 

주둥이마다 피를 묻힌 까마귀들이 앞산 넘어간다 금방, 캄캄해진다

                     주석 없이


탱자나무 울타리를 돌 때

너는 전반부 없이 이해됐다

너는 註釋 없이 이해됐다

내 온 몸에 글자 같은 가시가 뻗쳤다

가시나무 울타리를 나는 맨몸으로 비집고 들어갔다

가시 속에 살아도 즐거운 새처럼

경계를 무시하며


1초 만에 너를 모두 이해해버린 나를 이해해다오


가시와 가시 사이

탱자꽃 필 때


나는 너를 이해하는데 1초가 걸렸다


 

문맹

  

 

펄프를 물에 풀어, 백지를 만드는 제지공들은 하나님 같다

흰 눈을 내려

세상을 문자 이전으로 되돌려 놓으려는 조물주 같다

 

티없는, 죄 없는

순백

無化의 길...

 

더욱 완전한 백지에 이르고자

없애고 없애고 또 없애는 것이 제지공의 길이다, 제지공의 삶이다,

마치 거지의 길이며 성자의 삶 같다

 

그러므로

오늘도 백지 만드는 제지공들은 자꾸만 문자를 잃어 간다

문맹이 되어 간다

문명에서-문맹으로

 

휴일 없이

3교대 종이 공장 제지공들은 출근을 한다

 

그의 흉터 

  흉터는 뚜껑이다

  흉터는 자물통이다

  흉터는 그로부터 도무지 떨어지지 않는다

  뚜껑 중의 뚜껑,
  한 인간을 잠그고 있는 흉터는

  아무도 열지 못한다

  만능열쇠마저 소용없다, 금고털이도 불가능하다

  흉터는 외부에서 열지 못하는 뚜껑이다
  흉터는 그의 밀실이다
  흉터는 바깥에 열쇠구멍이 없다
  흉터는 늙은 수리공마저 포기한 열쇠로 잠겨 있다

  흉터 속에 그가
  열쇠를 움켜쥐고 들어가 웅크리고 있다

 

            직방 

 

아아 이 두통 - 지금
나에겐 직방으로 듣는 약이 필요하다

그렇다 얼마나 간절히 직방을 원했던지
오늘 낮에 나는 하마터면 자동차 핸들을 꺾지 않아
직방으로 절벽에 떨어져 죽을 뻔 했다

직방으로 骨로 갈 뻔했다

오, 직방으로

다가오는 연애, 쏟아져내리는
눈물, 폭포

안다, 미친 자만이 직방으로 뛰어간다

십오층 아파트 베란다에서
몸을 날린 직방인(直放人)처럼
바닥 밑의 바닥, 과녁 뒤의 과녁을 향해 뛰어내리고 있는

이렇게 사십년 동안을 뛰어내리고 있는 - 나는

 

            꿀맛

 

   아카시아 언덕 밑에서 벌 치는 사람을 만난다 나는 본다 그의 벌통들,

하나의 출입구로 드나드는 수많은 벌떼를 본다 저 벌통은 면할 길 없는

서민 아파트다 기어들어 가고 기어나오는 출입구가 하나뿐이다 나는 출

구와 입구가 하나뿐인 목숨들을 본다 그의 벌통 앞에 흩어져 있는 벌들

의 주검을, 본다 벌치는 사람의 빗자루에 슥슥 쓸려 사라지는 벌들의 주

검, 주검을 밟고 다니며 주검을 으깨고 다니며 벌치는 사람이 꿀 따는 걸

본다 나도 주검 하나를 조심조심 발바닥으로 뭉개어본다 그에게서 꿀 한

종지를 얻어, 먹어본다

 

  달다, 주검이 남긴 꿀처럼 찐득찐득 흘러내리는 저 앞 산마루 노을

 

 

 

출처 : 말더듬이의 편지
글쓴이 : 체스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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