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시

[스크랩] 최문자 < 믿음에 대하여 > 외 12편

시치 2009. 10. 2. 17:03

믿음에 대하여

 

그녀는 믿는 버릇이 있다.
금방 날아갈 휘발유 같은 말도 믿는다.
그녀는 낯을 가리지 않고 믿는다.
그녀는 못 믿을 남자도 믿는다.
한 남자가 잘라온 다발 꽃을 믿는다.
꽃다발로 묶인 헛소리를 믿는다.
밑동은 딴 데 두고
대궁으로 걸어오는 반토막짜리 사랑도 믿는다.
고장난 뻐꾸기 시계가 네시에 정오를 알렸다.
그녀는 뻐꾸기를 믿는다.
뻐꾸기 울음과 정오 사이를 의심하지 않는다.
그녀의 믿음은 지푸라기처럼 따스하다.

먹먹하게 가는 귀 먹은
그녀의 믿음 끝에 어떤 것도 들여놓지 못한다.

그녀는 못 뽑힌 구멍투성이다.
믿을 때마다 돋아나는 못,
못들을 껴안아야 돋아나던 믿음.
그녀는 매일 밤 피를 닦으며 잠이 든다.

 

꽃은 자전거를 타고

그녀가 죽던 날
꽃은 자전거를 타고 왔다
그녀의 남자가 입원실 현관 앞에 자전거를 세우고
막 아네모네 꽃을 내리려고 할 때
그녀의 심장은 뚝 멎었다
꽃은 다시 자전거를 타고 영안실 근처로 갔다
죽을 자리에서도 타오른다는 아네모네가
놀란 자전거를 타고 앉아
헛바퀴만 돌리고 또 돌렸다

그날,
꽃은 온종일 자전거에게 끌려 다녔다
꽃을 태운 자전거는 참았던 속력을 냈다
꽃도 그녀처럼 자전거를 타고 앉아
남자의 등을 탁탁 때리며 달렸다
꽃은 내부가 무너지도록 달렸다
마지막 꽃 한송이가
바닥에 떨어지면서 뭐라고 말했지만
바람이 그 말을 쓸어갔다

그날,
빈 자전거 한 대
고수부지 잡석 사이에 쓰러져 있었다

 

정전기                   

건기인가봐요 우리

새들도 입안이 마른다는

바짝 마른 말로 통화하고 있잖아요 지금

마른 대궁만 남은 당신 말에

나는 없는 미련 지지직거리며

타는 시늉 다 해보지만

갑자기 들러붙어요

말과 말 사이

부슬부슬 떨어지는 말의 먼지들 뿌연데

들리죠

우리 언어가 물 마르는 소리

따가워요

메마른 통화

갈라진 언어의 살 사이로

피 내비쳐요

건기인가봐요 우리

 

   공회전

사랑이 미끄러운줄
나는 안다.
속도제한 없는 아우토반 free-way
그 곳을 나는 안다.
거의 참을 수 없을 만큼 달릴 때
그 때는 느낄 수 없었던 수막 같은
눈물현상을
바퀴가 혼비백산 하던 그 황홀을
팽팽한 그 차로에서 나와
어지로운 허리띠를 풀때야
나는 알았다.
한 발자국도 물러날 수 없는 쓸쓸함에다
징그런 수술자국 하나 긋고
어디를 건드려도
눈물 차오르던 고속주행의 후유증
그 후로
자주 멈추는 자동차를 위하여
동맥까지 우울하게 떨려오는 시동을 미리 건다.
쓸쓸한 바퀴의 노동 끝에 묻었다가
지상으로 떨어지는 진흙빛 허무를 내려다보며
사랑만 닳아지는 공회전을 한다.
헛바퀴가 돌아갈 적마다
헛소리를 지르다 제자리에 기절해버리는
그런 아픈 바퀴를
나는 네개씩이나 달고다닌다는 사실을
뒤늦게야 알게 되었다.

        잿빛여행

                            

식이 끝나고 서둘러 신혼여행을 떠날 때

결혼이 여행인 줄 몰랐지

몇 번이고 짐을 꾸렸다 끌렀다 했지

단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는 곳으로

처음엔 웃으며 떠났지

들끓는 꽃들 사이에 서서

뭐든지 이름도 모르고 사랑했지

그곳은 뜨거운 가슴속에 있는 땅이었지

목적지 절만쯤에서

꽃이 별로 없는 벌판 거기서 길을 잃었을 때

지도를 펴보고야 알았지

기쁨이 뭉개진 표지판, 고개 돌린 회색 도시들

펄럭이는 종이지도를 접으며

우리는 알았지

걸을수록 신대륙이 없어지는 걸

발견할 땅이 없어도

걸어가야 한다는 걸

분명 여행을 하고 있었는데

돌아올 수 없는 걸 알았지

깨진 꽃

그 어두운 조각들이

머지 않아 재가 될 남은 시간들이

벽과 벽 사이를 돌아

요리저리 구불거리며

나로부터 떠내려가고 있다는 걸

 

   시벨의 일요일

 

영화 <시벨의 일요일>에서

일요일, 한 남자가 죽는다

총성이 울리자

유괴범으로 몰린 남자 하나가

숲 속에서 푹 쓰러지고

시벨이 아무렇지도 않게 숲을 걸어나온다

총에 맞은 잔혹한 일요일

뻥 �린 억울한 일요일이

영화 한 장면에서 클로즈업된다

기억의 누더기를 헤쳐보면

내게도 클로즈업되는 억울한 월요일이 있다

시간이 7일을 파먹고도

배고팠던 그 다음날

총알을 지나서 온 월요일

삶에서 총성이 울리면

한 남자가 내게서 걸어나갔다.

아무렇지도 않게 시벨처럼 ----

내 것이 아니었지만 내게 고여 있던

내 것이 아니었지만 내게 장전된 채

수북한 잡풀 속에 누워 있던 월요일

숲에서 쓰러진 남자보다

더 텅 빈 얼굴

시벨인 남자를 미워하다가

미움이 넘쳐도 달콤했던 그 월요일

어리석은 경찰의 총구 앞으로

그는 시벨처럼 걸어나갔고

나는 아직도 잡풀 더미에 푹 쓰러져있다

시벨의 일요일보다 하루 더 파먹힌

월요일마다

 

퇴원 

   

문병 왔다가 듬뿍 꽃아놓고 간 안개꽃과 장미꽃 다발

그들은

썩은 시간을 느껴본 적이 있을까?

꽃병이 몇일이나 꽃에게 시달렸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썩은 꽃의 음부도

마지막까지 꽃이라고 확신하는

저 믿음

썩는 것이 꽃인 줄 몰랐다

살기를 열망하는 자 옆에서

죽기를 결심하는 꽃

 

퇴원하는 날

간병인이 쓰레기통에 꽃을 쑤셔 박았다

복도 끝방에서 울음소리가 들렸다

말기 자궁암 환자였던 주검이

홑이불을 뒤집어쓰고 버린 꽃 앞을 지났다

시달리던 꽃병들이 뒤를 따랐다


벽과의 동침

 

  이십 년 넘게 벽 같은 남자와 살았다. 어둡고 딱딱한 벽을 위태롭게 쾅쾅 쳐 왔다. 벽을 치면 소리 대신 피가 났다. 피가 날 적마다 벽은 멈추지 않고 더 벽이 되었다. 커튼을 쳐도 벽은 커튼 속에서도 자랐다. 깊은 밤, 책과 놀다 쓰러진 잠에서 언뜻 깨보면 나는 벽과 뒤엉켜 있었다. 어느새 벽 속을 파고 내가 대못처럼 들어가 있었다. 눈도 코도 입도 숨도 벽 속에서 막혔다.

 요즘 밤마다 내가 박혀 있던 자리에서 우수수 돌가루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벽의 영혼이 마르는 슬픈 소리가 들린다. 더 이상 벽을 때릴 수 없는 예감이 든다. 나는 벽의 폐허였다. 그 벽에 머리를 오래 처박고 식은땀 흘리는 나는 녹슨 대못이었다.

 

유언  

 

위암 말기라고 했다

새카많게 탄 말을

잘도 삼키더니

묻는 말에

대답 한마디 못하고

혓바닥에서 푹 꺼진다

손목을 잡아주었다

가물가물한 체온이

이미 진흙을 덧바르고 있다

찌르르 말이 흐른다

불 붙다 쓰러진 말

연기에 그을린 문장

억지로 말문을 닫을 때마다

시계를 보며 시각을 읽었으리라

아무 것도 모르는 숫자를 읽으며

삼켜버린 말들

그때,

누군가가 가슴을 내밀고

받아 적었어야 했다

손목에 차고 있던 그 말을

 

 실종

 

  상수도 보호구역 입간판을 지나 습지로 갔다 너를 찍을

까 했다 흘러간 너를 너를 따라 디카를 들고 습지를 절벅

거릴 때 렌즈가 뿌옇게 흐려졌다 눈물일까? 그래서 이번

엔 눈물을 찍을까 했다 포착된 눈물 안에 새떼가 가득 날

아오고 새와 새 사이에서 새 울음소리가 들렸다 울음소리

에 줌 렌즈를 들이댔다 멀리 지나가던 열차가 새에게로

다가오며 울음소리를 깔아뭉갰다 새털과 함께 날아간 소

리와 눈물

  

 추억해야 할 것들은 모두 사라진다 간단한 설명조차 들

려주지 않고 등불처럼 하나하나 꺼져간다 빈 렌즈 앞을

바람이 지나간다 마지막으로 바람을 찍을까 했다 바람이

돼서 한 남자가 지나간 거리, 줌으로 바람을 잡는다 예정

된 이별이 보인다 닦고 조이고 기름쳐도 헛간 구석에 호

밀 가루 몇 봉지처럼 남아 있는 이별

 

태양이 노출을 맞춰주고 찰칵찰칵 허공이 나를 찍는 소

리가 들린다 사실은 나를 찍으려 했다 실종된...........

 

  나의 詩 

사과를 먹으면 서러워진다
서러워서 서러워서
후딱 그냥 먹어치울 수가 없다
자꾸 목메어
붉은 과일의 손목을 잡고
비겁한 타협 몇 개 해보지만
입안은 어두컴컴하고
사과의 언어는 푸르러서
부걱부걱 거품만 이는 대화.
멀고먼 사과의 맛
껍질채 섞어 먹어보지만
살과 껍질이
따로따로 떨어져 느껴지는 맛
맞아, 바로 이 맛이야, 나의 詩
먹을수록 서러워지는 맛
살과 섞일 수 없는 맛
밍밍하고 떫고 꺼끌꺼끌한 맛
껍질의 맛
행간에 걸려 힘없이 쓰러지는 이 맛

 

  이중주
우리는 피가 다른 나무를 베어 만든 악기
아픈 만큼 소리를 낼 때
음표 하나 놓고도
타오르고 떨리는 깊이가 달라
서로 갈아 엎는
너와 나 사이로
처음 베어낸
억센 나무 뿌리가 흘러간다.

보리 이삭을 북북 잘라내는
사내 옆에서.
들장미 그리고 사라진 구름 보다가
눈을 감는 아내
기계가
윙윙거리며 탈곡할 때
미끄러져 내리는 이중주.
보리와 들장미
사이에
발을 뻗는 가을


 

     Vertigo 비행감각  


  계기판보다 단 한 번의 느낌을 믿었다가 바다에 빠져 죽은 조종사의 이야기를 알고 있다. 그런 착시현상이 내게도 있었다. 바다를 하늘로 알고 거꾸로 날아가는 비행기처럼, 한쪽으로 기울어진 몸을 수평비행으로 알았다가 뒤집히는 비행기처럼 등대 불빛을 하늘의 별빛으로, 하강하는 것을 상승하는 것으로 알았다가 추락하는 비행기처럼

  그가 나를 고속으로 회전시켰을 때 모든 세상의 계기판을 버리고딱 한 번 느낌을 믿었던 사랑, 바다에 빠져 죽는 일이었다. 궤를 벗어나 한없이 추락하다 산산이 부서지는 일이었다. 까무룩하게 거꾸로 거꾸로 날아갈 때 바다와 별빛이 올라붙는 느낌은 죽음 직전에 갖는 딱 한 번의 황홀이었다.

 

 죄책감

  

하나님이

강둑에 세워둔 표지판

'낚시금지'

하나님이 말갛게 씻어놓은 죄를

이미 용서받은 물고기들을

밤새워 내가 끄집어올립니다

비린내 진동하는 날밤 새우며

 

  이별은 시원하다 

바람이 있다

조금씩 부서지고 어긋나고 있는 관계 사이에

바람이 있다

푸석푸석한 관계의 살점만 보면

착 달라붙는 다   바람

 

너와 내가 한없이 깜박거릴 때

바람이 있다

이대로

꺼질까, 켜질까?

생각해보는 사이사이에 바람이 있다

네가 나로부터

내가 너로부터

기진해서 부슬부슬 떨어질 때

바람이 있다

너는 서쪽으로

나를 남쪽 끝으로

끌고 간 바람 속에 바람이 있다

바람과 바람 사이에 이별이 있다

이별과 이별 사이에

수없이 넘어진 자국이 있다

바람이 이별을 말릴 때 시원하다

눈물과 눈물 사이가

시원하다

 

출처 : 말더듬이의 편지
글쓴이 : 체스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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