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손택수 < 얼음탁본 > 외 10 편
얼음 탁본 / 손택수
얼어붙은 연못 위에 낙엽이 누워 있다
얼음에 전신을 음각하는 이파리,
파고들어 간 자리가
움푹하다
끌도 정도 없이
살갗을 파고드는 비문이 있다면
비문도 나의 살점이 아니겠는가
말을 안으로 감추어 버린 白碑
속에서 말을 꺼내듯
빙판을 어루만지는 손,
마음에 탁본이라도 떠볼까
덜 아문 딱지라도 뜯듯
이파리를 걷어 내자
얼음 속으로 실핏줄이 이어진다
따끔따끔 떨어져 나온 자리마다
잎맥이 돋아난다
화살나무
언뜻 내민 촉들은 바깥을 향해
기세 좋게 뻗어가고 있는 것 같지만
실은 제 살을 관통하여, 자신을 명중시키기 위해
일사불란하게 모여들고 있는 가지들
자신의 몸 속에 과녁을 갖고 산다
살아갈수록 중심으로부터 점덤 더
멀어지는 동심원, 나이테를 품고 산다
가장 먼 목표물은 언제나 내 안에 있었으니
어디로도 날아가지 못하는, 시윗줄처럼
팽팽하게 당겨진 산길 위에서
소금쟁이의 연애
바람 한 점 없는데 못물 위에 파문이 번지는 건
소금쟁이 때문이다 소금쟁이의 순전한 연애 때문이다
가만 보면 암컷인지 수컷인지 바람기 농한 소금쟁이 한 마리가
멀찌감치 떨어진 짝에게 무슨 신호를 보낸다
제 미미한 몸을 상하 좌우로 흔들어 고요한 수면을 깨우더니
보일 듯 말 듯 한 파문이 스르르 번져가서
좀체로 곁을 두려 하지 않는 짝의 발바닥을 간지른다
간지름을 참지 못하고 푸르르 떠는 건너편의 소금쟁이
가장 미세한 떨림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예민하게 가늘어진 다리, 파문에 감전된
다리의 떨림도 답신처럼 넌지시, 보기에 따라서는 수줍게
잔잔한 물결을 이루며 연못을 건너간다
소금쟁이 한 쌍의 은근한 수작 때문에
잠시도 잠들지 못하고 술렁이는 연못.
연꽃 에밀레
연꽃잎 위에 비가 내려 친다
에밀레종 종신에 새겨진 연꽃을
당목이 치듯, 가라앉은
물결을 고랑고랑 일으켜 세우며 간다
수심을 헤아릴 길 없는, 끔찍하게 고요한
저 연못도 일찍이 애 하나를 삼켜버렸다
애 하나를 삼키고선 단 한 번도
바닥을 드러낸 적이 없다
어린 내가 아침마다 밥 얻으러 오던
미친 여자에게 던지던 돌멩이처럼
비가 내려칠 때마다 연꽃
꾹 참은 아픔이 수면 위로 퍼져나간다
당목이 종신에 닿은 순간 종도
저처럼 연하게 풀어져 떨고 있었으리라
에밀레 에밀레 산발한 바람이
수면에 닿았다 튀어오른
빗줄기를 뒤로 힘껏 잡아당겼다
수평선
배가 해를 안고 바다를 다린다
꾸욱꾸욱 주름을 펴며 수평선을 건너간다
복화술사처럼 한 일자로 입을 다문 수평선
저 과묵 속엔 얼마나 많은 파란만장이
물결치고 있다는 말인가
이 생에 수평선처럼 쫙 펴지긴 글러먹은 마음이여
달오른 갑판 머리에서 피어오르는
스팀 물보라를 보라
날이 선 일등 항해사
제복을 꿈꾸던 시절이 내게도 있었다
-'신생' 2007년 봄호
방심(放心)
한낮 대청마루에 누워 앞뒤 문을 열어 놓고 있다가,
앞뒤 문으로 나락드락 불어오는 바람에 겨드랑이
땀을 식히고 있다가,
스윽, 제비 한마리가,
집을 관통했다
그 하얀 아랫배,
내 낯바닥에
닿을 듯 말듯,
한순간,
스쳐지나가 버렸다
집이 잠시 어안이 벙벙
그야말로 무방비로
앞뒤로 뻥
뚫려버린 순간,
제비 아래배처럼 하얗고 서늘한 바람이
사립문을 빠져 나가는 게 보였다
내 몸의 숨구멍이란 숨구멍을 모두 확 열어 젖히고
墨竹 습자지처럼 얇게 쌓인 숫눈 위로 소쿠리 장수 할머니가 담양 오일장을 가면 할머니가 걸어간 길만 녹아 읍내 장터까지 긴 墨竹을 친다 아침해가 나자 질척이는 먹물이 눈 속으로 스며들어 짙은 농담을 이루고 눈 속에 잠들어 있던 댓이파리 발자국들도 무리지어 얇은 종이 위로 돋아나고 어린 나는 창틀에 베껴 그린 그림 한 장 끼워놓고 싸륵싸륵 눈 녹는 소리를 듣는다 대나무 허리가 우지끈 부러지지 않을만큼 꼭 그만큼씩만, 눈이 오는 소리를 듣는다 |
지하철 농법 / 손택수
밭 아래로 지하철이 지나간다
밭을 매고 있으면 두두두두
수천 마리 두더지 떼가 몰려온듯
지진이 인다
소작을 준 주인 장씨는
복토를 하다 삽날에 철근 부딪는 소리가 나자
덜컥 겁을 집어먹고 그냥 땅을 덮어버렸고,
우리 밭의 상일꾼인 지렁이는 지난밤
지하철 천장까지 내려갔다가
웅성거리는 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
방울토마토 뿌리로 다시 돌아왔다
삽을 씻고 호미를 씻고
지하철을 타고 귀가할 때마다
나는 생각한다 내 머리 위의 뒤틀어진 뿌리들,
돌을 움켜쥐듯 내 머리통을 꽈악 움켜쥐고
땅을 일구고 있는 뿌리들
지하철이 요람을 흔들며 지나간다
경기처럼 꿈틀대는 뿌리들 생각으로
환하게 불 켠 눈에 실뿌리 핏발이 서고
지하철 소리 자장가 삼아 들깻잎 푸르러간다
- 2007<작가세계>겨울호
쥐수염붓
왕희지와 추사가 아꼈던 붓이다
족제비나 토끼털로 만든 붓도 있지만
그 중에도 으뜸은 쥐수염붓
놀라지 마라, 명필들은
쥐 수염 중에도
배 갑판 마루 아래에 사는 쥐에게서
가장 상품의 붓이 나온다고 믿었단다
배가 삐걱거릴 때마다
수염을 쫑긋거리는 쥐
파도가 치는 대로
머루알 같은 눈망울을 반짝이며
먼지 한 점 떨어지는 소리도 놓치지 않고 쭈뼛
일어설 줄 아는
그 수염이 최상의 붓이 되는 것이다
쥐에겐 여간 미안한 일이 아니지만
소심하다, 신경이 그렇게 날카로워서야
어찌 살겠느냐
핀잔을 듣는 날이 많지만
불안한 눈망울을 반짝반짝
수챗구멍을 들락거리는 하루하루
쥐 수염 같은 것이 내게도 있어
듬뿍 머금은 먹물로 일필
휘지하고 싶은 때가 있는 것이다
나무의 수사학
꽃이 피었다,
도시가 나무에게
반어법을 가르친 것이다
이 도시의 이주민이 된 뒤부터
속마음을 곧이 곧대로 드러낸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나도 곧 깨닫게 되었지만
살아있자, 악착같이 들뜬 뿌리라도 내리자
속마음을 감추는 대신
비트는 법을 익히게 된 서른 몇 이후부터
나무는 나의 스승
그가 견딜 수 없는 건
꽃향기 따라 나비와 벌이
붕붕거린다는 것,
내성이 생긴 이파리를
벌레들이 변함없이 아삭아삭
뜯어먹는다는 것
도로가 시끄러운 가로등 곁에서 허구한날
신경증과 불면증에 시달리며 피어나는 꽃
참을 수 없다 나무는, 알고 보면
치욕으로 푸르다
- 2008 제22회 소월시문학상 작품집 중에서
자기라는 말에 종신보험을 들다
자기라는 말, 참 오랜만에 들어본다
딱딱하게 이어지던 대화 끝에
여자후배의 입술 사이로 무심코
튀어나온 자기, 어
여자후배는 잠시 당황하다
들고 온 보험서류를 내밀지 못하고 허둥거린다
한순간 잔뜩 긴장하고 듣던 나를
맥없이 무장해제시켜버린 자기,
사랑에 빠진 여자는 아무때고
꽃잎에 이슬이 매달리듯
혀끝에 자기라는 말이 촉촉이 매달려 있는가
주책이지 뭐야, 한번은 어머니하고 얘기할 때도 그랬어
꽃집 앞에 내다논 화분을 보고도
자기, 참 예쁘다
중얼거리다가 혼자서 얼마나 무안했게
나는 망설이던 보험을 들기로 한다
그것도 아주 종신보험을 들기로 한다
자기, 사랑에 빠진 말 속에
언덕 위의 붉은 벽돌집/ 손택수
연탄이 떨어진 방, 원고지 붉은 빈칸 속에 긴긴 편지를 쓰고 있었다
살아서 무덤에 들 듯 이불 돌돌 아랫도리에 손을 데우며, 창문 너머
금 간 하늘 아래 언덕 위의 붉은 벽돌집, 전학 온 여자아이가 피아
노를 치고
보, 고, 싶, 다, 보, 고, 싶, 다 눈이 내리던 날들
벽돌 붉은 벽에 등을 기대고 싶었다 볼의 뿌리에 닿고 싶은 하루하
루 햇빛이 묻어 놓고 간 온기라도 여직 남아 있다는 듯 눈사람이 되
어, 눈사람이 되어 만질 수 있는 희망이란 벽돌 속에 꿈을 수혈하는
일
만져도 녹지 않는, 꺼지지 않는 불을
새벽이 오도록 빈 벽돌 속에 시를 점화하며, 수신자 불명의 편지만
켜켜이 쌓여가던 세월, 그 아이는 떠나도 벽돌집도 이내 허물어지고
말았지만 가슴속 노을 한 채 지워지지 않는다 내 구워낸 불들 싸늘
히 잠들고 비록 힘없이 깨어지곤 하였지만
눈 내리는 황금빛 둥지 속으로 새 한 마리 하염없이 날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