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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3회 <시안> 신인상 당선작. 천지주차장 외 4편 / 김남수

시치 2009. 9. 24. 21:23

제 23회 <시안> 신인상 당선작

 

 천지주차장 외 4편 / 김남수

 

 

  나팔꽃 두 줄기가 기우뚱 널빤지 간판을 밀어 올린다 얼기설기 베니어 조각 덧댄 담장 위, 누가 매달았을까 ‘천지주차장’ 붉은 글씨를 읽은 하늘이 중심을 잡아준다 길섶 흙먼지 뒤집어쓴 개망초 수시로 기웃거리는 변두리 공터주차장, 입구를 지키는 감나무 묵은 둥치가 비쩍 마른 개 한 마리 붙들고 있다 지나가던 봄이 ‘계세요? 계세요?’ 마른기침을 접수시켜도 기척 없고 심드렁한 누렁이가 배를 깔고 누워 있다

 

  장맛비 오락가락 개밥 그릇에 고이는 주말, 불안한 먹구름부대가 주차료 한 푼 내지 않고 한나절 쉬어 간 후, 빈 하늘 하품하던 주차장이 떠도는 뭉게구름 두 대를 겨우 붙잡았다 적막한 주차장이 걸어놓은 하늘수채화, 평생 무단 주차중인 늙은 감나무가 풋감 한 차 부려놓고 파릇한 곁가지를 흔든다 나팔꽃이 오랜만에 주차 일지를 점검한다

 

 

숟가락에게 밥을 먹이다 / 김남수

 

싱크대 서랍 속 오래된 숟가락 한 개 묻혀있다

아무도 꺼내보지 않는 녹슨 시간을

손잡이 떨어져 나간 아래 칸이 애지중지 보듬고 있다

그 해 여름 물에 젖은 고향마을

되보뚝 강가에서 데려온 지 스물일곱 해

무덤 같은 서랍문을 열고 나온다

 

삼백예순 번 두들겨 맞아야 완성되는 방짜 놋숟가락

 

어느 대장장이의 새벽 닭 울음이 미완의 담금질을 서둘러 마무리 했을까

울룩불룩 널브러진 볼

마른 손잡이

손바닥에 올려놓고 오래 들여다본다

 

산 아래 발 벗은 움막집

오글오글 무 속 파먹으며 겨울을 건너왔을까

재 너머 방물장수 등에 업은 애기

한 술 두 술 집집마다 얻어 먹여도

칭얼대는 해질녘, 동구 밖

버드나무 그늘 떠먹이다 늙어갔을까

 

모서리마다 아프게 핥아주다

밥상머리 한 번 올라보지 못한 낡은 놋숟가락

오랜만에 따순 밥 지어 고봉 한 술 떠먹인다

 

 

 

피리소리 한 사발 / 김남수

 

 

식혜의 배경에는 싹튼 보리가 있습니다

달콤한 한 사발의 보리피리 소리를 원한다면

서두르지 마세요

젖은 보리에서 초록 눈이 올라오는 순간

겨울의 언덕을 건너

맷돌에 부서지는 통증을 지나

엿길금 가루로 거듭 납니다

 

참고 기다리세요

어둠이 내리는 저녁 보리밭을 지나가는 고운 바람 한 되

체에 내리세요

한 동이 물과 만나 은근해지도록 그윽한 눈길 보낸 후

말간 보리의 눈물만 받아 하룻밤 재우세요

밤새 뒤척이던 소용돌이 아래로 아래로 가라앉고

뜬소문도 삭아 내리면

투명한 그리움만 따라 내세요

선택된 눈물이 허기진 밥알을 만나 뜨거워지도록 배려하세요

미지근한 온도에서 끓을 수도 식을 수도 없는 발효의 시간

열어보지 마세요

해뜨는 아침부터 해지는 저녁까지

회한의 언덕을 지나 두둥실 떠오른 사랑

까칠한 신경질이 숨어 있을지 모릅니다

뜨거운 불에 한 번 더 올리세요

우르르 일어서는 덜 삭은 잡념 걷어내면

밥알 동동 들통에서 휘- 피리소리 한 줄기

남도의 푸른 들녘이 출렁입니다

눈물의 언덕을 건너,

 

인고의 피리 소리 한 사발

 

 

 

국제열쇠 / 김남수

 

  까치산 가는 길에 열쇠집이 있습니다

 

  사거리 신호등 여닫힐 때마다 ‘1급 기능사의집’ 펄럭이는 입간판이 혼자 분주한
국제열쇠

 

  허리끈 같은 도로를 오토바이에 걸쳐놓고 강씨가 공구함을 집어듭니다

  벽면 주렁주렁 열린 눈 없는 열쇠들 지루하게 늙어가고 ‘잠시 외출중입니다’ 아크
릴 간판이 오후 세 시를 잠급니다

 

  덜덜거리는 오토바이가 ‘30초 복제완성’ 국제열쇠를 꽁무니에 싣고 구름놀이터로
올라갑니다 산 번지 골목들이 차례로 열립니다

 

  야근 서두르는 달맞이꽃 하나 둘 제 몸 여는 언덕 아래 대추나무집, 몇 년 째 소
식 끊긴 아들 기다리던 어머니는 세상 문을 닫았습니다

 

  이웃들 왕래마저 빗장을 잠갔습니다

 

  지도가 외면한 골목들 철컥철컥 여는 사내, 만능 국제열쇠도 벼락 맞은 대추나무
집 녹슨 어미 가슴을 열지 못했습니다

 

 

나무벤치 / 김남수

 

은행잎 몇, 앉아있다

빗방울이 귀엣말을 나누고간다

계절의 순례자로 채웠다 비워지는 환승역

얼마나 많은 산그늘이 쉬어갔는지

삐걱거리는 다리를 한삼덩굴이 감아올린다

 

지난 봄 물결치던 살 냄새 톱질하던 일용근로자

김씨가 허방 짚은 하루를 내려놓고 간다

 

까칠하게 야위어가는 벤치의 근심

 

발아래 제비꽃들의 자잘한 청보라빛 위로가

무더기로 올라오고

산자락 뒤적이던 햇살이 내려와

못자국난 슬픔을 말려준다

 

정랑고개 너머 계남산 아래

순한 무릎에 쾅쾅 못질한 아카시나무 벤치

더디 오는 마을버스가

뉘엿뉘엿 노을을 싣고 떠나면

종일 서 있던 가로등이

아픈 다리를 슬며시 벤치에 내려놓는다


2009. <시안>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