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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낙화, 첫사랑

시치 2009. 9. 17. 23:04

낙화, 첫사랑

 

 

김선우

 

1

 

그대가 아찔한 절벽 끝에서

바람의 열굴로 서성인다면 그대를 부르지 않겠습

니다

옷깃 부둥키며 수선스럽지 않겠습니다

그대에게 무슨 연유가 있겠거니

내 사랑의 몫으로

그대의 뒷모습을 마지막 순간까지 지켜보겠습니다

손 내밀지 않고 그대를 다 가지겠습니다

 

 

2

 

아주 조금만 먼저 바닥에 닿겠습니다

가장 낮게 엎드린 처마를 끌고

추락하는 그대의 속도를 앞지르겠습니다

내 생을 사랑하지 않고는

다른 생을 사랑할 수 없음을 늦게 알았습니다

그대보다 먼저 바닥에 닿아

강보에 아기를 받듯 온몸으로 나를 받겠습니다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문학과 지성사

 

 

 

그대와 나, 두 존재 중 누구를 택할 것인가. 아니 그건 선택의 문제는 아니다. 그대가 떨어지고 내가 떨어진다. 그들은 둘 다 존재의 스러짐을 통해 사랑의 절정에 선다. 어찌 사랑의 절정을 저 낙화로 말해야 할까. 이 세상의 삶을 통째로 버리는 절벽의 끝에 선 순간에 우리는 스스로의 존재적 가치에 방점 하나 찍을 수 있으리. 그대가 혼신의 힘으로 살아온 꽃 같은 생애를 날리는 그 시간, 나 역시 그 절벽에 서야 한다. 그리고 그대를 사랑할 그 영혼으로 나는 나의 영혼을 받아내야 한다. 그것이 그대를 사랑하는 나의 최선임을 나는 늦게야 깨닫는다. 언제나 깨달음은 한 발 늦다. 첫사랑의 서러움이다. 그러나, 늦고 또 늦었어도 좋다. 나를 사랑하리라. 나를 받아내리라. 그대를 사랑하기 위하여, 그 늦은 깨달음에 축복을!

출처 : 청랑 김은주가 머무는 사랑의 공간
글쓴이 : 명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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