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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슬픈 공복 / 정진규

시치 2009. 8. 25. 11:59

슬픈 공복

   정진규

 

 

 

거기 늘 있던 강물들이 비로소 흐르는 게 보인다 흐르니까 아득하다 춥다 오한이 든다

 

나보다 앞서 주섬주섬 길 떠날 채비를 하는 슬픈 내 역마살이 오슬오슬 소름으로 돋는다

 

찬 바람에 서걱이는 옥수숫대들, 휑하니 뚫린 밭고랑이 보이고 호미 한 자루 고꾸라져 있다

 

누가 던져두고 떠나버린 낚싯대 하나 홀로 잠겨 있는 방죽으로 간다 허리 꺾인 갈대들 물 속 맨발이 시리다

 

11월이 오고 있는 겨울 초입엔 배고픈 채로 나를 한참 견디는 슬픈 공복의 저녁이 오래 저문다

 

 

 

—《시안》2009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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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규 / 1939년 경기도 안성 출생. 고려대 국문과 졸업. 196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나팔 抒情」가작 입선. 시집 『마른 수수깡의 평화』(1965)로 등단. 『유한의 빗장』『들판의 비인 집이로다』『매달려 있음의 세상』『비어있음의 충만을 위하여』『연필로 쓰기』『뼈에 대하여』『옹이에 대하여』『몸시』『알시』『도둑이 다녀가셨다』『본색』『껍질』. 현재 《현대시학》주간.

출처 : 푸른 시의 방
글쓴이 : 강인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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