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관련글

[스크랩] 작가도서관/시인 오인태

시치 2009. 8. 24. 20:48

 
   

 시인  오 인 태 吳仁泰
      

       약 력

      

         - 1962년 경남 함양에서 태어남

         - 진주교대 대학원 졸업. 경상대학교 대학원 박사과정에서 문학교육 전공(교육학박사)  

         - 1991년『녹두꽃』3집을 통해 문단활동 시작 
         - 시집『그곳인들 바람 불지 않겠나』(1992년)

                『혼자 먹는 밥』(1998년)
                『등뒤의 사랑』(2002년)

                『아버지의 집』(2006년) 펴냄

         - 89년 전교조활동으로 해직되었다가 94년에 복직

         - 현재 진주 도동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며 진주교대 등에 출강

         - (사)한국작가회의 이사, 경남작가회의 회장
   

      ◇ E-mail / ohit12@hanmail.net

      ◇ 홈페이지/ http://www.sibab.pe.kr(또는 한글로 오인태)

     
    
     대표시
    아버지의 집
    한 때, 
    아버지는 목욕탕 보일러공이었다 
    쉰 나이 넘어 논 팔고 집 팔아 이농을 하고 
    이 공장 저 공사판 떠돌다가 
    아버지는 예순 넘어 하필 남의 집 아궁이에 
    남은 생애의 집을 지었다 
    나이보다 팽팽한 얼굴에 통통한 몸집의 목
    욕탕 주인 과부는 
    걸핏하면 그 위태하기 짝이 없는 
    아버지의 집을 흔들어댔지만, 
    그래도 이만한 데가 없다며 
    아버지는 한사코 
    부들부들 떨리던 부지깽이와 
    부삽을 내려놓지 못했다 
    그런 밤엔 목욕탕 문간 옆 단칸방, 
    아버지의 집에는 송진 타는 냄새가 끓어올랐다 
    때로는 폐타이어 역한 냄새도 섞여 
    앙등을 하는 것이었는데, 
    교대를 졸업하고도 선생이 되지 못한 채 
    빌붙어 아버지의 청자 담배나 몰래 
    축내던 때, 나는 단 한 번도 그 집을 
    우리 집이라 부르지 않았다 
    마침내 초등학교교사로 정식발령을 받고 
    이후 아버지도, 집도 
    까마득히 잊어버렸던 것이었는데, 
    그 세월 동안 남의 아궁이 앞에서 
    아버지는 가슴속에 얼마나 많은 집을 짓고,* 
    또 태우셨을 것인가 
    모른다 
    위로 누나 넷을 낳고 늦게 장남을 본, 그
    마흔 나이를 넘어 오는 동안 
    아버지도 가고, 아버지의 집도 재가 되어 
    하얗게 사라진 줄 알았는데 
    이렇듯 
    나는 오래전에 아버지 대신 
    버젓이 주민등록상의 호주가 되어 
    새 집에 살고 있는데 
    도대체 내 가슴에 아궁이처럼 시커멓게 입을 벌리고 있는 
    이 집은?
    *김명남의 「농부의 명함」중 일부분 인용
      - 시집『아버지의 집』에서
    가시연 
    떠다니는 것들이 어찌 물의 속을 헤아리랴 
    그 깊은 밑바닥에 뿌리내린 그대의 생애는 
    한 순간도 수심을 거스런 적 없다는 걸 알고 있다
    때로는 발꿈치 돋워 높게
    때로는 무릎 꿇고 낮게 엎드리며
    더러 부유하는 것들, 또는 위로만 제 몸을 키우는 
    것들의 철없는 유혹의 말은 흘려들을 일이었으나 
    물의 숨소리 한 낱에도 민감했을 그대의 귀는 
    섬섬히 열려 매운 가시가 되었으리니
    그리하여 그대는 이미 물의 표정, 혹은 
    물의 화석, 그 잠기고 묻혀 알 수 없는 내막을 
    주름진 눈매를 통해 짐작할 뿐,
    이상하다. 나는 늘 물기에 젖어있는 그대 
    푸른 얼굴에서 왜 광물성 화기를 느끼는지 
    모를 일이다. 
    빗금으로 쏟아지는 햇살에 
    펄펄 단련되어 물의 숨통마다 분화구 같은 
    파문을 낼 것 같은 청동악기 
    그 맑은 
    그래, 그대 물 하나를 흔드는* 득음을 하셨는가
    *배한봉시인의 시 '우포늪의 왁새'의 '산 하나를 흔드는'부분을 변주함 
      - 시집『아버지의 집』에서
    착한 길
    풀은 
    풀끼리 서로 길을 막아서는 법이 없더라
 

    주남저수지에는 가래, 마름, 가시연꽃, 노랑어리연꽃, 물옥잠, 자라풀, 생이가래......,물의 천장을 덮고 있는 것들이 붕어마름, 물수세미, 검정말, 나사말......, 물속에 잠겨 보이지 않는 것들의 숨통을 선뜻 제 몸 비켜 열어주고 있더라

    물 위에 나있는 저  
    착한 길들.  
       - 시집『아버지의 집』에서
    예쁜 손

    일산에서 손시인과 동태찌개로 더운 점심밥을 먹으면서, 미안했다 용인에 있는 정시인의 병 문안을 가는 길이었으니, 뇌종양을 앓고 있는 그는 지금쯤 이승의 남은 밥그릇을 어림하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아플 때는 밥이라도 잘먹어야한다며 그 목멜 밥숟갈에 간간한 밥반찬이라도 얹어주자는 손시인의 말에 소래포구로 차를 돌린 것이었는데, 그날따라 하늘과 땅의, 바다와 뭍의 경계를 지우며 허연 눈발이 흩날렸다 우왕좌왕

    삶과 죽음의 경계 또한 이렇듯 모호하고도 불안한 것이리라 한참 길을 헤매다 찾아든 소래포구, 마른 갈대들이 갈피를 못 잡고 종종거리고 있었지만 여기저기, 헤진 깃발들은 길을 알려주지 못하고 있다 미친 듯이 바람은 향방을 잃은 채 나부대고, 겁도 없이 대열의 앞장에서 손을 치켜들던 내 이십대, 이은 삼십대조차 두렵고 부끄러웠던지, 아, 눈을 돌린, 저기 폐염전 위의 소금창고 몇은 건재하다 여전히 소금을 쌓듯 혁명을 꿈꾸는가 눈발은 필름 끊긴 영화 스크린의 잔광처럼 번득이는데, 아무렴

    살아야한다 목이 메더라도
    새우젓이며 어리굴젓이며 오징어젓갈을 
    꾸역꾸역 담고 있는 저 
    예쁜 손들 
       - 시집『아버지의 집』에서
    상족암*에서
    발자국은 절벽에서 홀연히 끊겼다

    그 순간, 깊은 울음을 내지르며 그이의 눈은 천길 만길 아득한 저 바다를 내려다보았을까 아니면 겁에 질린 눈으로 붉었을 하늘을 쳐다보았을까 여리고 지순한 진흙같은 가슴에 날카로운 발자국을 찍어대며 무거운 생의 사변 하나 지나갔음이야 또한 추측할 뿐이다

    잊어버려라 잊어버려라 속 모르는 파도는 끊임없이 세상의 가볍디가벼운 사랑을 속삭이며 위로하려들지만, 정작 그 긴 세월 바위가 되도록 부릅뜬 눈을 감을 수 없는 이유는 이렇듯 가슴에 깊이 패인 상처가 아파서가 아니라 어디론가 쫓기듯 사라지던 그이의 뒷모습이 못내 눈에 밟혀서이리라 느닷없이 찾아와서 한 번도 허락한 적 없는 순결한 몸에 불도장 같은 뜨거운 사랑의 흔적을 남기고 현옹수도 채 멎기 전에 표연히 사라진,

    아, 내 처음이자 마지막 사랑도 그렇게 왔다 갔다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하자 다만, 그 퀭한 바위의 눈들이 내내 서늘해서 말이다
     

    *경남 고성의 공룡발자국 화석이 있는 바위 해변
      - 시집『아버지의 집』에서
     

    등뒤의 사랑  
    앞만 보며 걸어왔다. 
    걷다가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모를 일이다. 등을 돌리자 
    저만치 걸어가는 사람의 하얀 등이 
    보였다. 아, 그는 내 등뒤에서 
    얼마나 많은 날을 흐느껴 
    울었던 것일까. 그 수척한 등줄기에 
    상수리나무였는지 혹은 자작나무였는지, 
    잎들의 그림자가 눈물자국처럼 얼룩졌다. 
    내가 이렇게 터무니없는 사랑을 좇아 
    끝도 보이지 않는 숲길을 앞만 보며 
    걸어올 때, 이따금 머리 위를 서늘하게 
    덮으며 내가 좇던 사랑의 환영으로 
    어른거렸던 그 어두운 그림자는 
    그의 슬픔의 그늘이었을까. 때때로 
    발목을 적시며 걸음을 무겁게 하던 
    그것은 그의 눈물이었을까
    그럴 때마다 모든 숲이 
    파르르 떨며 흐느끼던 그것은 
    무너지는 오열이었을까. 
    미안하다. 내 등뒤의 사랑 
    끝내 내가 좇던 사랑은 
    보이지 않고 이렇게 문득 
    오던 길을 되돌아보게 되지만
    나는 달려가 차마 그대의 
    등을 돌려 세울 수가 없었다.
       -시집『등뒤의 사랑』에서.
    사람의 가슴에도 레일이 있다
    그 여름 내내
    기차는 하필 잠들지 못하는
    늦은 밤이나 너무 일찍 
    깨어버리고야 마는 새벽녘에야 
    당도해서 가슴을 밟고 지나갔다. 
    사람의 가슴에도 레일이 있는 것임을 
    그 해 여름 그 역 부근에 살면서, 
    한 사람을 난감하게 그리워하면서 
    비로소 알았다. 낮 동안 기차가 오고, 
    또 지나갔는지는 모를 일이다. 
    딸랑딸랑 기차의 당도를 
    알리는 종소리는 늘 가슴부터 
    흔들어 놓았다. 그 순간 
    레일 위의 어떤 금속이나 
    닳고닳은 침목의 혈관인들 
    터질 듯 긴장하지 않았으랴. 이어 
    기차는 견딜 수 없는 육중한 
    무게로 와서는 가슴을 철컥철컥 
    밟고 어딘가로 사라져갔다. 
    아주 짧게, 
    그러나 그 무게가 얼마나 오래도록 
    사람의 가슴을 짓눌렀는지를 
    아, 기차는 모를 것이다. 
       -시집『등뒤의 사랑』에서
    혼자 먹는 밥  
    찬밥 한 덩어리도
    뻘건 희망 한 조각씩
    척척 걸쳐 뜨겁게
    나눠먹던 때가 있었다.
    채 채워지기도 전에 
    짐짓 부른 체 서로 먼저
    숟가락을 양보하며
    남의 입에 들어가는 밥에
    내 배가 불러지며
    힘이 솟던 때가 있었다. 
    밥을 같이 먹는다는 건
    삶을 같이 한다는 것
    이제 뿔뿔이 흩어진 사람들은
    누구도 삶을 같이 하려 
    하지 않는다.
    나눌 희망도 
    서로 힘돋우워 
    함께 할 삶도 없이
    단지 배만 채우기 위해 
    혼자 밥먹는 세상 
    밥맛 없다.
    참 살맛 없다.
       -시집『혼자 먹는 밥』에서
    다산 초당에서  
    산그늘이 내리고
    나무들은 모두 
    그림자를 거둬들였다.
    풀들도 순순히 제 색깔을 
    어둠 속에 맡기고 
    어차피 길손들은 
    서둘러 산을 내려갔다. 
    다시 세상은 적막하여라.
    이따금 낮게 산죽 쓸리는 소리
    언제 오셨나. 천일각 위에
    달님 한 분 내려다보고 계시다.
       -시집『혼자 먹는 밥』에서
    아우에게 
    너에게는 참 할말이 없다.
    위로 누나 넷으로 늦본 맏이 그늘에 묻혀
    입는 것 하나 제대로 네 몫으로 산 것 없고
    먹는 것 하나 따뜻하게 네 것으로
    챙겨진 일 없던 아우야
    형이 네가 못 나온 고등학교를 나오고
    값싼 교육대학이나마 졸업한 것은
    누나들이 그랬던 것처럼
    보리밥으로 덮은 형의 쌀밥 도시락과
    쌀밥으로 덮은 네 보리밥 도시락의 차이를
    묵묵히 눈물로 삼켰을 아픈 인내와
    희생의 대가임을 이 형인들 모를까
    네가 책가방보다 또래들의
    주먹다짐에나 어울리고
    어렵게 입학한 공고를 몇 달 만에
    네 말대로 때려치우고 나온 것도
    아우야 이 형은 네 속깊은 마음을
    두려움으로 간직하고 있다.
    그런 형이 네게는 사치스런
    구호로 들릴지 모를
    '교육민주화'니 '정의'니 '양심'이니 하며
    식구들의 굶주림과 눈물과
    끝내는 어머니의 죽음으로 바꾼
    교단을 쫓겨나와 너를 대하던 날
    한마디 말없이 지켜보던 네 눈빛이
    '차비나 하라'며 쥐어 주던 지폐 몇 장이
    돌아오는 찻길 내내 칼날바람 되어
    가슴 도려지고 너에게는 참 할말이 없다
    미루나무 그림자 속으로 멀어 지며
    돌아보는 눈길 몇 번이나 마주치던
    아우야
       -시집『그곳인들 바람 불지 않겠나』에서
    
    냉이꽃 1 
    길가에나 묵정밭
    더러는 쇠똥무덤 돌틈새
    찰싹 몸 붙이고 있다가
    일제히 고개 들고 일어나
    세상을 하얗게 덮어 버리는
    혼자서는 작은 꽃
    어우러져서 큰 꽃
       - 시집『그곳인들 바람 불지 않겠나』에서
    
      시집
    
 
 

▣ 작가의 말

   예순을 넘기고 아버지는 고향 뒷산에 당신이 묻힐 자리를 골라 치표를 하셨다. 소나무와 장대넝쿨, 쇠뜨기가 무성한 거기,

 
   마지막까지 그런 아버지의 호사스런 이기심이 못마땅했지만, 10여 년 후, 나는 당신의 뜻을 받들 수밖에 없었는데, 아버지에 대한 내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 순종이었다. 그 이후, 

   나는 애써 아버지를 잊었다. 내게 남겨진 세상은 홀로 넘어야할 산이었고, 건너야 할 물이었다. 뒤돌아보지 않았다. 고개 숙이지도 않았다. 눈은 위로 치뜨고 두 주먹을 불끈 쥔 채, 앞만 보며 내달렸다. 그러다 아버지가 나를 낳은 바로 그 나이, 

   마흔 고개를 넘고서야 비로소 내 살아온 날들을 뒤돌아보게 되었다. 그리고 더불어 살아온 것들에 이마 맞대며 연민과 감사의 마음을 가질 수 있었다. 드넓은 하늘, 포근한 땅, 착한 풀과 꽃과 벌레들, 정겨운 사람들......,
 

                                                                           2006년 여름, 남강변에서

                                                                                  

                                                                                                    오인태

     

     

    ▣ 해설

                          사랑, 존재와 내통하는 길


       

                                                               고 명 철(문학평론가, 광운대 교수)

     


       오인태의 시집 『아버지의 집』을 읽으면서 ‘착하다’라는 말의 참뜻을 되새겨보았다. 어린 시절부터 ‘착해야 한다’라는 도덕적 규범 속에서, 어쩌면 우리는 ‘착하다’에 숨어 있는 참뜻을 너무나 쉽게 지나쳐왔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예, ‘착함’에 맹목화되어, 무슨 일이든지 말 그대로 ‘착하기만 하면’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여기서 오인태 시인은 이렇게 일상 속에서 진부할 대로 진부한 ‘착함’에 대해 시인 나름대로의 시적 통찰을 보여준다.



        풀은
        풀끼리 서로 길을 막아서는 법이 없더라

        주남저수지에는 가래, 마름, 가시연꽃, 노랑어리연꽃, 물옥잠, 자라풀, 생이가 래……, 물의 천장을 덮고 있는 것들이 붕어마름, 물수세미, 검정말, 나사말……, 물속에 잠겨 보이지 않는 것들의 숨통을 선뜻 제 몸 비켜 열어주고 있더라

       물 위에 나있는 저
       착한 길들
         ― 「착한 길」 전문



       주남저수지에는 온갖 수생식물들이 살고 있다. 저수지의 표면과 물 속에서 수생식물들은 나름대로의 삶을 살고 있다. 그런데 수생식물들은 자신의 삶의 길을 고집하되, 서로 다른 수생식물들의 삶의 길을 방해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저수지의 표면에 살고 있는 식물들은 “물 속에 잠겨 보이지 않는 것들의 숨통을 선뜻 제 몸 비켜 열어주고 있”다. 저수지를 가득 채우고 있는 수생식물들의 삶은 그렇게 서로 조화를 이루며 공존한다. 그러면서 식물들은 서로의 삶의 길을 방해하지 않으며 저수지의 생태에 참여한다. 이것이 바로 시인이 주목하는 “물 위에 나있는 저/착한 길들”의 ‘착함’의 속성이다. 즉, 조화와 공존의 길로서 착함의 지경에 이르는 것이야말로 주남저수지의 생태를 이루고 있는 ‘삶의 온전한 길[道]’이다.

     

      오인태 시인의 이러한 시적 통찰은 세상을 제 잘난 맛으로 살고 있는 뭇사람들에게 반성적 성찰의 계기를 제공한다. 아무리 자신이 남보다 뛰어난 역량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남들과 조화롭게 살아가는 가운데 상생의 길을 가야하는 것이지, 남의 길을 가로막고, 자신의 길만을 가려고 하는 것은 ‘착한 길’을 가는 게 결코 아니다. 하여 ‘착한 길’에 대한 시인의 시적 통찰을 이해할 수 있을 때, “진짜 예쁜 꽃은 저 혼자 뽐내는 것이 아니라 제 사는 세상을 눈부시게 하는 것이더군 아직 새싹 하나 돋지 않은 언덕이 왜 이리 환한지 다가가 가만히 들여다보면 거기 함께 사는 잔디들과 똑 같이 낮고, 작고, 노랗게//숨어 피어 있는”(「양지꽃」) 양지꽃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느껴볼 수 있을 터이다. 이 아름다움은 자신의 몸을 낮추는 가운데 주위의 존재들과 자연스레 어우러지면서 피어나는 아름다움이다.

     

      그런데, 말이 쉽지. 자신의 몸을 낮춘다는 것처럼 어려운 일도 없다. 몸을 낮춤으로써 세상을 향한 오만과 불손의 태도를 버리고, 자신의 생을 경건히 추스르는 것이야말로 낮춤의 진정한 아름다움이다. 



       저 고춧싹보다도 작은 것이
       하늘 가릴 지붕 하나 받들어
       제 한 생을 가뿐히 살아가고 있구나

       두터운 숲을 뚫는 햇볕도
       키 큰 나무의 목덜미를 후려치는 폭우도
       저 우주 안을 감히 범접하진 못하리라

       얼마나 낮추어 작아지면 내 생도
       저처럼 온전히 받쳐 들 수 있으랴

       발아래 우산이끼를 우러르다
       ― 「우산이끼를 우러르다」 전문

     


       저 보잘것없는 우산이끼로부터 시인은 삶의 경건성과 엄숙성을 깨닫는다. 기껏해야 제 몸뚱어리 하나만을 지탱하고 있는 아주 작은 지붕하나만을 갖고 있을 뿐인데, 그 보잘것없는 지붕 하나가 우산이끼의 삶을 지켜내고 있다. 우산이끼는 그렇게 우주적 존재의 하나로서 자신의 삶의 비루함을 넘어서고 있는 셈이다. 여기에는 말할 필요 없이 삶의 비루함을 넘어서는 우산이끼의 대지를 향한 뿌리내리기의 생래적 속성을 간과할 수 없다. 작고 보잘것없는 존재일수록 자신의 생을 보존하기 위해 강한 생의 의지를 품는다. 뿌리를 뻗칠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뿌리를 뻗어내린다. 하여 자신의 존재성을 보증받는다.


       그렇다면, 이러한 뿌리내리기의 행위에 대한 시적 인식을 살펴볼 수 있는 시를 읽어보자.



       떠다니는 것들이 어찌 물의 속을 헤아리랴

       그 깊은 밑바닥에 뿌리내린 그대의 생애는
       한 순간도 수심을 거스른 적 없다는 걸 알고 있다
       때로는 발꿈치 돋워 높게
       때로는 무릎 꿇고 낮게 엎드리며

       더러 부유하는 것들, 또는 위로만 제 몸을 키우는
       것들의 철없는 유혹의 말은 흘려들을 일이었으나
       물의 숨소리 한 낱에도 민감했을 그대의 귀는
       섬섬히 열려 매운 가시가 되었으리니
     
       (중략)
       빗금으로 쏟아지는 햇살에
       펄펄 단련되어 물의 숨통마다 분화구 같은
       파문을 낼 것 같은 청동악기
       그 맑은

       그래, 그대 물 하나를 흔드는 득음을 하셨는가
       ― 「가시연」 부분



       수심 위로 떠다니는 것으로만 알고 있는 가시연은, 기실 그 뿌리를 물 밑바닥에 내려있으면서 물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고, 물의 생래와 한데 어울려 가시연의 존재를 드러낸다. 그러면서 가시연은 물의 숨소리 하나라도 흘려버리지 않고, 물의 미세한 결들을 하나라도 지나치지 않고, 물과 한데 어울려 섞인다. 물에 대한 민감함은 가시가 되어, 물의 온갖 자극을 감지해낸다. 하여, 드디어 가시연은 “물 하나를 흔드는 득음”의 지경에 이른다. 물 속에 있으면서, 물과의 내통을 통해 물의 속성과 자연스레 어울리더니만, 끝내 물을 공명(共鳴)해내는 지경에 도달한다. 이러한 게 가능한 것은 가시연이 뿌리를 내렸기 때문이다. 뿌리를 내려, 주위의 대상들과 내통하는 과정 속에서 지금까지 갖지 못했던 가시연의 또다른 존재성을 획득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우주와 내통하는 길[道]을 열었기에 가능하다. 그런데, 우주와 내통하는 길이 그렇게 간단한 사안은 아니다. 우주와 내통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삶과 정직하게 맞대면해야 하며, 그러한 대면을 통해 무엇보다 자신의 삶과 내통해야 한다. 자신이 곧 우주이듯, 자신의 삶과 동떨어진 우주와의 내통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것인지는 새삼 강조할 필요도 없을 터이다. 이러한 점을 고려해볼 때 이번 시집의 제명을 ‘아버지의 집’으로 삼은 연유를 생각해볼 수 있다. 시집의 표제작인 「아버지의 집」을 통해 우리는 오인태 시인이 그동안 혹시 소외시켰던 자신의 존재와 대면함으로써 ‘지금, 이곳’의 시인 자신을 향한 내면의 교류를 통해 자신의 삶과 내통하려는 시적 진정성을 읽을 수 있다. 

     


       교대를 졸업하고도 선생이 되지 못한 채
       빌붙어 아버지의 청자 담배나 몰래
       축내던 때, 나는 단 한 번도 그 집을
       우리 집이라 부르지 않았다

       마침내
       초등학교교사로 정식발령을 받고
       이후 아버지도, 집도
       까마득히 잊어버렸던 것이었는데,
       그 세월 동안 남의 아궁이 앞에서
       아버지는 가슴속에 얼마나 많은 집을 짓고
       또 태우셨을 것인가
       모른다

       위로 누나 넷을 낳고 늦게 장남을 본, 그
       마흔 나이를 넘어오는 동안
       아버지도 가고, 아버지의 집도 재가 되어
       하얗게 사라진 줄 알았는데

       이렇듯
       나는 오래전에 아버지 대신
       버젓이 주민등록상의 호주가 되어
       새 집에 살고 있는데

       도대체 내 가슴에 아궁이처럼 시커멓게 입을 벌리고 있는
       이 집은?
        ― 「아버지의 집」 부분

     


       “목욕탕 보일러공이었”던 아버지가 마련한 집을 시적 화자인 ‘나’는 우리집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아버지가, 왜, 하필이면, 집을 “남의 집 아궁이에/남은 생애의 집을 지었”는지 도저히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이렇게 ‘나’가 살고 있는 집을, ‘나’는 ‘우리집’이 아니라 ‘아버지의 집’으로만 인식한다. 그러던 ‘나’는 교사가 되었고, “아버지 대신/버젓이 주민등록상의 호주가 되어/새 집에 살고 있”다. 아버지와 같은 궁상맞은 집이 아니라 새 집에 살고 있다. 그런데 그토록 미워했고 부정하고 싶었던 아버지의 존재를 지워낼 수 없다. 비로소 ‘나’는 “남의 아궁이 앞에서/아버지는 가슴속에 얼마나 많은 집을 짓고/또 태우셨을 것인가”, 하는 아버지의 심정을 조금이라도 헤아려볼 수 있는 나이를 먹었다. “마흔 나이를 넘어오는 동안” ‘나’는 과거의 ‘나’를 부정하였다. 과거의 ‘나’는 아버지의 삶과 연루되었기에 아버지와 단절된 삶 속에서 ‘나’를 부정하였던 셈이다. 하지만 이제 ‘나’는 아버지의 삶과의 단절이 아니라, 아버지의 삶과 내통하려는 고통을 앓는다. 아버지의 삶과의 내통은 곧 그동안 소외시켰던 ‘나’의 과거와의 내통이므로, ‘나’는 고통스럽다. ‘나’의 과거를 대면하지 않고서는 ‘지금, 이곳’의 ‘나’의 존재 가치를 ‘나’ 스스로 확보할 수 없으며, ‘나’의 새 집에서 살 수 없다. 
      

       이렇게 ‘나’와 내통하는 내적 고통을 통할 때 ‘나’는 타자들과의 내통의 길을 낼 수 있으며, 타자들의 삶의 고통을 위무하고, 그러한 고통을 안겨준 세계를 향한 시적 대응을 할 수 있다. 이라크전쟁이 일어나고, 중동의 사막에서 자행되고 있는 온갖 반인간적 작태에 대한 시인의 분노와 허탈감은 바로 이러한 내적 고통의 과정을 겪으면서, 타자들을 향한 시적 인식이며 시적 실천의 산물이다. 



       죽이지만 말아다오
       절규하는 네 등 뒤엔 낯을 가린
       알 수 없는 얼굴들이 버텨 서있었다
       그들은 누구인가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네 목덜미에 끝내 사막의 바람보다
       더 날카로운 비수를 꽂아버린
       그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 「얼굴 없는 얼굴」 부분


       그 긴 목에 개목걸이를 무겁게
       늘어뜨린 아랍 사내가 개가 아니라
       사람에게 개의 목걸이를 채운
       당신들이 개였다 당신들의 등 뒤에서
       당신들의 목을 더 견고한 쇠목걸이로
       묶어놓고 웃고 있는 당신들의 제국,
       당신들은 그 끝을 알 수 없는 사막에
       풀어놓은 한 떼의 개일 뿐이다 이미
       수많은 린디 잉글랜드 일병이여
       그러나 당신들은 알지 못한다
       낙타는 사막을 건너도
       개는 사막을 건너지 못함을
       아부 그라이브 감옥이여
       엄연한 당신들의 미래여
        ― 「린디 잉글랜드 일병에게」 부분 

     


       「얼굴 없는 얼굴」에서는 김선일 씨의 비통한 죽음을 통해 아랍의 급진 테러리스트의 폭력에 속절없이 목숨을 빼앗긴 데 대한 시인의 허탈과 분노의 감정을 읽을 수 있으며, 「린디 잉글랜드 일병에게」에서는 명분 없는 이라크전쟁을 통해 중동의 패권을 차지하려는 미국의 제국주의적 폭력에 대한 시인의 가차없는 비판이 드러나 있다. 아랍의 급진 테러리스트와 미국 모두 중동의 평화에 암적인 존재들이다. 그들이야말로 중동의 평화를 위협하는 폭력 그 자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흔히들 세계의 화약고라고 얘기하는 중동은 오늘도 분쟁이 끊이질 않고 있다. 중동의 패권을 차지하고자 하는 미국의 제국주의적 속성과, 아랍민족주의(혹은 아랍의 자종족중심주의)가 급진성을 갖는 한 중동의 평화는 요원하기만 할 것이다.

      사실, 이게 어찌 중동만의 얘기던가. 우리의 경우 분단의 시련은 한반도를 포함한 동북아의 평화에 위협이 되고 있지 않은가. 한반도를 둘러싼 세계 열강의 이해관계 속에서 남과 북은 여전히 대치하고 있으며, 평화의 국면이 모색되는가 싶더니, 다시 갈등과 긴장 국면이 일어나면서 평화가 정착되고 있지 않다.

     


       저 수 억 광년 사이의 별들도 이렇듯 눈짓하여 부르면 한 순간에 지척인데 별보다도 먼 사람의 거리, 손끝 하나 닿지 못하는 이 막막함 속으로 풀벌레들은 왜 저리 목을 놓고 울어대는지
      ― 「사람의 거리」 부분

     


       분단으로 인한 ‘사람의 거리’는 “수 억 광년 사이”에 떨어져 있는 우주의 물리적 거리보다 더 멀기만 하다. 이 ‘사람의 거리’야말로 한반도와 동북아의 평화를 정착시키는 데 큰 걸림돌이다. 남과 북의 ‘사람의 거리’를 최대한 좁혀, 남과 북이 조화를 이루어 상생의 길을 모색할 수 있을 때 한반도는 물론, 전세계의 평화가 도래할 수 있을 터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문득, 「부론의 시」에서 다음과 같은 부분이 떠오른다.

     

     

       이렇듯 한순간 유순해지며 하나가 되는 이치를 보아하니 막무가내의 관성으로 맞부딪쳐 한사코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몸을 낮춰 서로의 몸 안으로 기꺼이 들어가는 것이었네 마치 오랜 연인의 정사처럼 익숙하게 두 몸이 섞이는 순간, 어떤 날카로운 긴장이나 동요도 없이 마침내 감쪽같은 강 하나가 산을 안고 태연히 흘러가는 것인데,
      ― 「부론의 시」 부분

     


       “제각기 흘러오던 물길이 합류하여 한 줄기를 이루는” 곳에서, 우리는 “어떤 날카로운 긴장이나 동요도 없이 마침내 감쪽같은 강 하나가 산을 안고 태연히 흘러가는” 비의성(秘義性)의 진실을 깨닫는다. 중동과 한반도를 포함하여 세계의 분쟁 지역뿐만 아니라 우리의 일상의 영역 안에서도 대립과 반목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은 바로 이와 같은 합수(合水)를 통해서 가능하지 않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막무가내로 서로 이질적인 것들을 섞는 게 아니라, 서로를 배려하고 용서하고 사랑해야 한다. 오인태 시인의 『아버지의 집』을 읽어가면서, 시집의 마지막에 배치한 「눈 오는 날엔」을 나지막이 읊조려본다. 혹, 우리는 사랑을 너무나 태만히 간주하고 있지는 않은가. 아니면, 사랑을 너무나 신비한 것 이상으로 경외시하고 있지는 않은가. 오인태 시인의 저 절절한 사랑의 노래를 들으며, 다시 시집을 들춘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일도 아름다워라 저렇듯 하늘이 캄캄하게 무너져 내려 세상을 하얗게 덮는다 한들, 끝내 묻을 수 없는 사람 있어 생가지가 더러 후드득 찢겨져도 제게 오는 무게를 다 받고 서있는 저 나무처럼 아픔도 슬픔도 온전히 감당할 수 있다면 혹은, 그리움에 환장이라도 하여 눈발처럼 맨발로 달려갈 수 있는 사랑이라면, 용서하리라 엎어져 하얗게 묻힌다 해도

       사랑하라 사랑하라
       지금 세상에 눈 내리고 있네

       용서하라 용서하라
       지금 그런 사랑 눈 맞으며 서있네
       ― 「눈 오는 날엔」 전문



    ▣ 시집 평

      우주와 내통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삶과 정직하게 맞대면해야 하며, 그러한 대면을 통해 무엇보다 자신의 삶과 내통해야 한다. 자신이 곧 우주이듯, 자신의 삶과 동떨어진 우주와의 내통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것인지는 새삼 강조할 필요도 없을 터이다. 이러한 점을 고려해볼 때 이번 시집의 제명을 ‘아버지의 집’으로 삼은 연유를 생각해볼 수 있다. 시집의 표제작인 「아버지의 집」을 통해 우리는 오인태 시인이 그동안 혹시 소외시켰던 자신의 존재와 대면함으로써 ‘지금, 이곳’의 시인 자신을 향한 내면의 교류를 통해 자신의 삶과 내통하려는 시적 진정성을 읽을 수 있다. - 고명철(문학평론가, 광운대교수)의 해설 중에서


      오인태는 꽃 풀 나무 바위 바람 햇살에게 눈길을 떼지 않는 착한 시인이다. 그는 주변에 널린 생물과 무생물에게 인격을 부여하여 같이 논다. 자연의 생태적 특징을 인간 생활의 원리와 교합시키는 상상력과 때때로 웃음을 유발하는 극적 구성을 통해 시 읽기의 즐거움을 선사한다. - 공광규(시인)


      진주교대 학생 때부터 지켜본 오인태의 詩가 바야흐로 절정으로 익어가고 있다. 나는 그 향기가 좋다. 향기 끝에 꽃은 피고 열매는 맺으리니 詩로 가는 십만 팔천리 길, ‘아버지의 집’ 뒤에 있을 것이니, 가자, 저물기 전에 아버지의 집을 지나 시인 오인태가 사는 집의 푸른 초인종을 누르고 싶다. 시인은 맨발로 깨달음의 저녁 앞에 서 있을 것이니. - 정일근(시인)

     


    ▣ 작가의 말
     

    사랑하는 일도, 사는 일도 도무지 쓸쓸하다 여겨져서
    마음이 마치 적막강산에 홀로 선 나무 같아질 때, 혹은
    모두가 잠든 새벽녘을 교교히 흐르는 달빛 같아질 때
    시는 내게 찾아오곤 했다.
    사십대가 되고 그런 날이 많아졌다.
    이 시는 내 쓸쓸한 사십대의 그림자에 다름 아니다.
    그런 그림자를 내게서 떼어 세상 밖으로 내보낸다.
    이제 다시는 내게 오지 마라.
    죽든지 살든지 그건 네가 알아서 할 일이다.
    그러나 네가 채 사립문도 나서기 전에
    내 등뒤를 서성이는 이 완강한 그림자는 또 무엇인가.
    도대체 얼마나 더 쓸쓸해야 할까. 그래도 어쩌랴.
    그래, 가지 마라 쓸쓸함아. 시야.
    이젠 내 사랑도, 남은 내 생애도
    아무런 대책 없이 버려 두지는 않겠다.
    너무 오랫동안 죄를 지었다. 내게, 그리고 내 사랑에게 
                                                                    2002년 겨울 오인태




    ▣ 해설

                         사랑의 환희와 삶의 비애

     


                                                                      김형수(시인, 문학평론가)

     


      몇몇 시인들의 입에 오인태라는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이 고등학교 때인지 대학교 때인지는 모르겠다. 첫 시집 <<그곳인들 바람 불지 않겠나>>의 해설에는 그가 이미 진주교육대학 1학년 시절에 기성 시인들과 더불어 ‘폭넓고 당찬’ 문학관을 피력했다고 회고되고 있다. 때는 개벽의 시대, 그는 역동적인 대학 문화의 복판에서 학보사 기자로 활동했지만 그때가 곧바로 그의 시대가 되어준 건 아니었다. 오인태 시인이 비로소 독자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91년이었다. 

      한 비평가의 말대로 “우리들 모두에게 치열한 ‘정치적 내전’의 시대였고, ‘상처의 시대’였으며 동시에, 썩어문드러진 사회를 변개 시켜보겠다고 우리의 젊은 세대가 변화의 희망과 열정을 불꽃처럼 사르던 ‘사자(獅子)의 시대’이기도 했던”(도정일) 때 한국 시는 크게 두 가닥으로 분화돼 있었다. 한쪽에 ‘감동적이며 불가피하게 영웅적’이었던 시의 길을 선택한 축이 있다면 맞은 편에는 또 다른 궤도에서 터져 나오는 ‘욕망의 대폭발과 범람’을 노래하는 시인들이 있었다.

      그가 신예의 패기로써 섣부른 감상주의나 미학적 허영을 등질 때는 내면 어딘가에 문학적 자신감이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메마르고 삭막한 투쟁의 시대가 그의 가슴을 뜨겁게 했는지 모른다. 초기의 그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기쁨과 상처에 주목했고, 또 시대의 위안을 노래하는 일에 몰두했다. 더러 기억하겠지만 데뷔작은 분명히 거창 양민 학살 문제를 그리는 시 <신원에서>를 비롯, 전교조 해직교사의 심정이 투영된 <부임기>와 <해임기> 등 4편이었던 것이다.

     

       똑같은 교문 그만그만한 운동장
       펄럭이는 태극기 모두 그 자리에 있는데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가고 있는가 지금은 봄
       사방 잡목림 속눈 틔울 꿈으로
       연두빛 도는데
       아아 돌아갈 데 없는
       내 봄은 아직 겨울이다
         - <개학하는 날에> 일부

     

     이런 시들이 대자보에 실려 구속과 투옥과 분신의 현장에 돌아다닐 때는 전혀 다른 색채를 띈다. 아마 그 때문에 오인태의 ‘그대’를 한용운의 ‘님’처럼 다의적으로 해석할 수 있을 터인데, 그렇더라도 그가 멋쩍어 하며 사랑의 시를 썼다는 말을 전해들을 때, 나는 시절의 어지러움을 우회하려는 서정적 변주일 거라고 여기고 싶었다.

      세상은 아직 우리가 ‘80년대’라고 명명했던 십 수년의 악몽과, 그 강박을 기만적으로 벗어난 몇 년의 혼몽에서 깨어나지 않은 상태였다. 성수대교가 무너지고 삼풍백화점이 붕괴된 것도, 또 IMF를 겪으면서 비로소 개발독재의 후유증을 드러낸 것도 그것의 일부였다. 우리는 여전히 일제로부터 비롯된 강압적이고 압축적인 근대의 잔해들 속에 서 있었던 것이다. 하여, 그의 시는 어차피 600년 묵은 전통을 남김없이 상실해버린 유서 깊은 도시 서울의 무질서, 그곳에 덮쳐오는 분단적 사건들의 거센 파도에 흔들려 잠시도 평심을 찾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던져질 수밖에 없다. 집단적 정서불안의 장소가 따로 없을 것이다. 시는 아마도 그런 환경에서 멀리 떨어진 남단의 바닷가에서 쓰여졌을 것이며, 내가 일독(一讀)을 하는 동안에도 우리 시대의 음울한 배경은 내 마음 한켠에서 어떤 작용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내가 시를 읽기 시작한 것은 하필 마지막 가을비가 지나간 뒤였다. 구름이 벗겨지면서 하늘이 모처럼 그 푸른 이마를 드러내는데, 날궂이 하느라 끼어 있었던 흐린 시야가 한 겹 한 겹 물러가고 있었다. 그 스산한 송별을 겸한 산책이었다고 해도 좋다. 문을 나설 때, 뒤뜰의 바람이 거칠게 머리칼을 풀어 가을비에 부서진 대(竹)이파리들을 흔들고 있었다. 여름내 창 밖에서 흔들리던 것들이 남김없이 사라지고 없는 것 같은데도 자연은 끝없이, 위태로울 듯 말 듯한 자기 운동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다음 시와 같았다.

     

       이렇듯 맑은 구슬 하나 품으려고
       간밤에 그렇게 무릎 세워
       엎드려 우셨습니까
       누군가의 울음이 이렇듯 눈부신
       아침을 만드는 것인지 몰랐습니다
         - <비 갠 아침>

     

      바람이 가지 끝에서부터 차례로 대 이파리를 뒤집으면 거기 얹혀 있던 빗방울이 흙밭에 후두둑 떨어지곤 했다. 막 울고 난 아이의 눈동자 같은 물방울들이었다. 그 영롱한 눈빛 하나 하나가 눈 한 번 깜짝할 새도 없이 허공에 수직을 긋기까지, 먼저 정적이 있었고 뒤이어 이파리를 뒤집는 바람소리가 있었으며, 다시 흙더미가 후두둑 패이는 현기증이 있었다. 자연의 이 미세한 파문의 언어를 듣지 못했다면, 오늘 나의 시 읽기는 조금 달라졌을지 모른다.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면서 얼핏 당황했던 기억이 새롭다. 시편들에는 어떠한 갈등의 그림자도 얼씬거리지 않았다. 한없이 고요하고 한결같이 착잡한, 그 시어들에는 한국사적 체험이라곤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어떠한 분노나 고발도 없이, 거의 속삭이는 듯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삶에 대한 회의와 성찰을 전할 뿐.

      그러나 어조의 부드러움 밑에서 ‘시적 여백’은 절망해 있었다. 그 절망을 이겨내면서 행간과 행간의 틈새에서 번져 나오는 침묵, 그 침묵이 주는 가슴 저릿한 아픔을 읽는 데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지 않았다.

     

       누가 또 내 등뒤에서
       서성이다 떠나갔을까
    
       (생략)
    
       늘 그랬다
       등뒤에 있는 사람은
       떠난 뒤에야
       이렇게 등이 없는 듯 허전했다
       그때에서야
       비로소 뒤를 돌아보면
       내 생애의 뒤안이
       누군가의 눈물에 젖어 있다
       아, 꽃잎은 모두 지고
       비가 오려나
         - <곡우 무렵> 일부

     

      눈앞의 일(세상일)이 아니라 등뒤의 일(개인적 체험)에 집착하려는 이 태도, 그러나 시들은 편편이 악에 대해 체념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악을 설명하거나 극복하려 하기보다는, 더 이상 언어의 질서에 속하지 않는 하나의 구원을 지향한다. 이게 어쩌면 세상의 온전성에 대한 그리움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역시 그 산책길에서였다. 아마 그것을 설명하자면 우리에게 있었던 80년대의 경로를 고백해야 할 것이다.

      아직 스무 살의 젊은이였을 때 나는 이 세계를 매우 온전한 것으로 믿고 있었다. 모든 삶은 그 하나 하나가 다 나름대로 완성을 향해 가는 것, 우리는 그저 꿈꾸는 대로 살아가면 된다. 만일 여의치 않는 일이 생기거든 그것은 필경 세상살이의 이치이려니…. 문제는 ‘나’라고 생각했다. 나는 세상의 울타리 바깥에 있는 사람처럼 스스로를 유배시켰다. 이 사회가 자랑하여 마지않는 성공이라든가 물질적 부의 축적은 아무런 설득력도 주지 못했다. 더구나 정치적인 구호는 말할 것도 없었다. 아름다운 삶을 살고 싶었지만, 행복은 담장 너머로 쓸쓸하게 감나무를 적시며 떨어지는 가을비처럼 덧없는 것, 나는 끝없이 엇나가는 세상일과 삶의 실감에 다다를 수 없는 자의 타는 갈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5.18을 통과하면서 모든 것은 바뀌어 버렸다. 삶이란 얼마나 모멸스러운 것이었던가? 목숨은 만유인력을 잃은 지구의 어느 종기 위에 붙어 있는 것 같았다. 친구들이 있었지만 마음의 안정과 평화가 있는 삶은 없었다. 세상은 공허했고, 나는 외로운 늑대처럼 허전해서 잠시도 한 곳에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조금만 가면 매번 금지의 팻말과 맞닥뜨려야 했다. 모든 길은 더 이상 가지 못하도록 그 어디쯤인가에서 막혀 있었다. 철조망이 쳐져 있거나 군인들이 지켜 서있거나 다른 감시기구가 늘 가로막고 있었던 것이다. 아, 그때는 우리가 20세기의 관리자들에게 포로처럼 묶여 있다는 생각을 왜 못하고 살았는지 모른다. 그 숨막히는 속박의 굴레를 빠져나가기 위해 우리들이 선택한 길은 ‘온전한 세계를 위한 헌신’이었다.

      광주민중항쟁을 겪고 난 십 수년의 청춘을 우리는 그렇게 보냈다. 사회질서가 온통 군대식 질서로 편재되어 있었던 것을 허물고, 그러나 아직 억업과 폭력의 충격에서는 미처 빠져 나오지 못한 상태. 이 한국적 삶의 답답함, 이 답답함과의 갈등. 쿠데타의 조력자들이 여전히 지도층을 형성하고 있었고, 익숙히 보아오던 부정과 비리와 부패는 용의주도하게 잔존해 있었다. 그런 상태에서 사람들은 ‘욕망의 대폭발과 범람’을 누리는데, 그것은 IMF를 겪고 난 지금까지도 여전해 보인다. 우리가 마흔의 나이를 넘긴 것은 그 와중이었다. 오인태의 시가 여러 차례 드러내 보이는 것은 그 같은 사실이다.

      그가 자꾸 마흔의 나이를 넘겼다고 말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우선 느낄 수 있는 것은 그가 새로운 홍역을 통과했다는 점이다. 어쩌면 한 차례 지울 수 없는 사랑이 지나간 것인지도 모르겠다.

     

       딸랑딸랑 기차의 당도를
       알리는 종소리는 늘 가슴부터
       흔들어놓았다. 그 순간
       레일 위의 어떤 금속이나
       닳고닳은 침목의 혈관인들
       터질 듯 긴장하지 않았으랴. 이어
       기차는 견딜 수 없는 육중한
       무게로 와서는 가슴을 철컥철컥
       밟고 어딘가로 사라져갔다
       아주 짧게,
       그러나 그 무게가 얼마나 오래도록
       사람의 가슴을 짓눌렀는지를
       아, 기차는 모를 것이다.
          - <사람의 가슴에도 레일이 있다> 일부

     

      이렇게 기관차처럼 무거운 ‘생의 사변’ 하나가 그의 가슴을 통과해 갔고, 그로부터 그는 존재의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래서 쓰여진 시들이 우리에게 연상시키는 것은 “문학은 헤어진 후에도 사랑하게 한다”는 어느 중국 작가의 말이다.

      앞서 인용한 <곡우 무렵>에 비유해 말한다면, 오인태 시인이 그간에 추구해온 것이 만일 ‘새로 싹트는 연두빛에 대한 갈구’였다고 한다면 이제 그의 주제는 ‘등뒤에서 헌신해준 것들에 대한 그리움’이 된다. 이제 그가 놓지 않으려고 집착하는 것은 지나가 버린 후의 사랑이고, 그것도 앞에서 온 사랑이 아니라 등뒤에 있어서 불현듯 스쳐가 버린 사랑이다. 어머니의 사랑처럼, 공기처럼, 반드시 필요하지만 있을 때는 못 느끼다가 사라진 후에야 울게 하는 그런 사랑. 그렇다면 그의 최근 시들을 사적인 연애이야기라고 볼 수만은 없을 것이다. 거기에 내포된 미학적 가치는 한 마디로 ‘울음의 진정성’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는데, 그것은 인간사의 보편적인 지평을 향해 열려 있고, 또 치열하며 뜨겁다.

     

       지독한 안개, 그 속에서
       사람들은 칼에 찔리고 총에 맞아
       트럭에 실려 어디론가 사라지고
       지독한 안개, 그 속에서
       남은 사람들은 그 해 그 도시에서
       벌어진 일들을 고개 저어 잊으려 했다
       그리하여 까마득히 잊혀져 간 일이었다
       모두가 안개 때문이라고 했다
          - <어느 날 샹송에서 안개를 만나다> 일부
    

     

     

      ‘사회적 실천’안에 있다가 이제 바깥으로 나와서 가슴아파하는 순정의 자리.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그 뒤에 아픔이 남는다는 것이다. 시를 읽고 나면 도대체 왜 아픈가? 그토록 절실하던 것들을 안개 속의 풍경으로 들여다보면서 한편으로 그는 개관(槪觀)할 수 있게 된 자의 아픔을 얻게 되었다. 그의 서정에 고뇌가 섞이기 시작한다. 그 고뇌가 울음의 진정성이 태어나는 진원지이다. 그래서,

     

       누가 발목을 저리도
       모질게 붙들고 있을까
       내 사랑은 끝내 담을 넘어
       내게 오지 못했다
       여름내 안간힘으로
       목만 늘이다가
       눈 부릅뜬 채로
       뚝뚝 떨어지고 말았다.
          - <능소화> 전문

     

      이렇게, 그는 이제 삶의 연민이 어디에서 비롯되는 지를 보게 되었으며, 또 뭔가를 사랑하면 할수록 자세를 더욱 낮춰야 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허리를 굽혀야
       눈 맞출 수 있는 꽃
       무릎을 꿇어야
       손잡을 수 있는 꽃
         - <제비꽃> 일부

     

      나는 지금 그 아픔에 대한 공감과, 그의 시적 화자들이 더 가까이 가지 않고 남겨둔 여백에 대한 아쉬움에 빠져 있다. 그러나 이 아쉬움은 시인에게 질문할 수 있는 것인가? 미안한 얘기지만 세상사에 맞서지 않는 시적 교활함은 그의 반대편에 있는 시인들에게 더 흔한지 모른다. 많은 시인들이 오직 인상깊은 구절을 얻으려고 분투하고 있다. 현란한 언어들, 광고 카피처럼 기발한 착상들, 대지도 없이 상황만 난무하는 저 가공할 내면의 호소들이야말로 이 시대가 겪는 참으로 아까운 ‘재능의 낭비벽’일 것이다.

      오인태 시인도 지난 십 수 년 동안 시작 활동을 해오며 미적 인식의 태도에 다소 변화를 겪었다. 그것은 크게는 세상을 보는 눈으로부터 작게는 즐겨 찾는 수사적 관습의 이행에 이르기까지 자못 폭넓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인태의 미덕은 여전히 수사적 허영을 모른다는 데 있다. 그는 시가 부실해지는 한이 있더라도 억지로 두드러지기보다는 자연스럽기를 희망한다. 형상을 비틀지 않고, 복잡하거나 꼬여 있게 그리지 않는다. 오직 자기 성찰의 시, 끝없는 자기와의 대화를 지속해 가는 그러한 시 쓰기를 지향하는 것이다.

      시인의 노래가 오늘의 세계에서 출구를 찾기에는 미명의 새벽길처럼 아직 희미한 느낌이 없지 않지만, 그래도 나는 이런 노래가 ‘상처 입지 않을 수 있는 세계, 온전한 세계를 찾는 노정’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길을 회복할 자기 귀환의 한 갱도(坑道)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면서 한 가지 아쉬운 대목은, 그가 너무 쉽게 젊음을 버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염려가 남는다는 점이다. 삶의 갈피 속으로 좀더 깊이 헤쳐 들어가지 못하고, 또 자간(字間)이 촘촘하지 않다. 털어 낼 글자들을 다 털지 않아서 세월의 부피에 비해서 알맹이가 조금 헐렁해졌다는 얘기를 내가 지금 말미에 덧붙이고 싶은 것이다. 그의 정직한 가락을 좋아하는 동료의 한 사람으로서, 아무쪼록 많은 독자의 관심을 청해본다.

     


    ▣ 단평

    * 현란한 수식과 자폐적인 시가 난무하는 지금의 시단에서 오인태 시의 담박한 기품은 허세와 가식이 없이 연연하다. 웅숭깊은 목소리로 조용히 읊조리는 듯한 그의 시는 세상과 삶을 오롯이 껴안는 사랑의 선율이다. 그는 자기 몫의 외로움을 안고 등뒤의 사랑을 그리워하지만 기실 등뒤는 그 자신의 자리이다. 불혹의 문턱을 넘은 그의 시는 삶의 뒤안을 돌아보게 하는 나직한 비가로 우리의 가슴을 적신다.

                                                                                                   - 정세기(시인)

    * 오인태는 섬세한 사람이다. 그의 시는 때로 가슴을 도려내지만 아프지 않게 하는 비결을 가지고 있다. 그의 진술은 풀잎처럼 여리나 예민하며, 격정적이나 뜨겁지 않다. 그 질료는 살갗 아래 숨어있는 체온처럼 온화하며 정직하다. 슬픔이건 외로움이건 그의 시가 안겨주는 감미로운 고통 또한 매우 특별한 경험이다.

                                                                                                 - 이명행(소설가)


    ▣ 서평

                  불혹(不惑)에 부르는 애절한 사랑노래

     


                                                                                                성기각(시인)


     

       1. 

      시인 오인태는 내게 있어 ‘칼과 불’을 새긴 한 장의 판화로 남아 있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제법 오래 전의 일로 기억된다. 언제 어디에서 처음 만났는지 정확한 기억이 없다는 것은 내가 그를 예사로 보았다는 뜻이 아니다. 당시 우리들의 모임이란 으레 거나한 소주판으로 시작되어 필름이 자꾸 끊어졌던 탓이리라.

      내가 새삼스럽게 오인태라는 판화를 다시 떠올린 것은 최근 그가 설파하는 일간신문의 글들이었다. 투박하기는 하나 걸쭉한 언어로 이 땅의 불의에 칼을 갖다대고 있는 그의 잡문(?)들을 읽으며 한때 우리 시대의 젊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기도 했다.

      그러다가 근자에 그의 시집 『등뒤의 사랑』을 읽고 나는 그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오인태라면 여전히 ‘칼과 불’을 노래하고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나만의 착각이었을까? 내 기억 속의 판화가 한순간 일그러지는 데에서 오는 아린 추억 때문에 그 날 나는 다시 소주잔을 기울이며 오인태를 통해 내 삶의 궤적을 따라가 보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다시, 어쩌면 이것이 변하지 않는 오인태의 모습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다시 그의 시집을 읽었다. 시인 오인태와 나는 동년배로 이 땅에 살고 있다. 저 서슬 푸른 80년대에 대학을 다니며 겪어야 했던 고통이 만만찮았던 그 시절을 떠올리다 다시 읽는 그의 ‘사랑노래’는 이 세상에 대한 집요한 애정이 아로새겨진 또 한 장의 판화가 아닐까. 이렇듯 격세지감에 빠져들면서 이 나이에 내게 있어 사랑은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해 보기도 하였다.

     


       2.
      그래, 사랑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행여 그 소중한 것을 잊고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오인태는 이 무렵 우리를 다시 흔들어 깨우는 것이 아닌가 한다. 나이 사십줄에 접어들면서 그가 집요하게 물고늘어지는 ‘사랑’이란 과연 무엇인가. 다음 시에서 그 실마리를 찾아보자. 

     

     

       내 마흔 생애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눈물이 배어 있을까
       생각하면 참 눈물이 난다.

       내가 누군가에 의해서
       또는, 누군가를 위해서
       흘린 눈물보다
       나로 해서
       혹은, 나를 위해서
       흘렸을 눈물이 더 많다면
       참 미안한 일이다.
         -「남해에서」 일부

     

      오인태의 이 시집에서 화두가 되고 있는 ‘사랑’은 맑고 아름다운 마음씨에 연유한다. 이미 위의 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듯이 남을 배려하는 데에서 ‘사랑’이라는 실체를 탐구하게 된다. 이 점은 충분히 자기성찰에 기대면서, 이기적 태도를 경계하는 것으로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그것이 바로 자신을 뒤돌아보게 하는 나이 40이 갖는 의미일는지도 모른다. 공자가 말하는 불혹(不惑)을 이 시대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남지만, 이 시집을 읽으면서 적어도 우리는 미혹하지 않기 위해 자신을 뒤돌아보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는가를 반성하게 된다. 일상사에 찌든 우리들에게 이것은 어쩌면 사치일지도 모르지만 그 사치스러움(?)으로 더 크게 깨닫게 하는 일이 시인의 사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태풍을 피해 들어온
       휴게소에서 감자를 먹으며
       문득 감자에게 미안했다.

       ...중략...

       그리고 한 여자에게 미안했다.
       세상이 두려워 감자처럼
       껍질을 두르고 살던,
       그래도 그 속에서 속살처럼
       잘 살고 있던 한 여자,

       그러다가 한 순간 그 껍질을
       다 벗고 내게 와서 처음으로
       하얀 알몸으로 나를 사랑했던
       한 여자에게 미안했다.
          -「감자」일부

     

      감자 한 알에도 뜨거운 애정을 쏟을 수 있는 오인태는 철저한 휴머니스트이다. 여린 감성을 가진 지아비다. 아니, 하얀 감자 하나에 아내라는 이미지를 떠올리는 그는 타고난 시인이다. 나는 이혼을 꾸꾸는 이 시대의 수많은 남편과 아내에게 이 시를 권하고 싶다. 남편들이여! 비록 ‘휴게소 감자’가 아니더라도 오늘 저녁 감자를 먹으며 오인태식으로(?) 아내를 생각해 보라. ‘하얀 알몸으로 나를 사랑했던 / 한 여자’를 향해 미안한 마음을 가질 수 있다면 좋겠다. 아내 또한 껍질을 다 벗고 하얀 알몸으로 지아비를 사랑해 보라. 이렇듯 이 시집은 나이 40이 되기까지 무심코 살아온 세월을 어느 날 뒤돌아보았을 때 오는 참된 애정에 대한 깨달음의 서정이다. 이 진솔한 서정이 그의 시가 갖는 힘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그까짓 세속의 사랑
       미련 못 버리고
       풀벌레 기척 하나에도
       귀가 쫑긋 발기하여
       온 밤을 뒤척이는
       이 불혹의 나이가
       부끄러워라
          -「운주사 와불」일부

     

     

      자신의 부끄러움을 진솔하게 고백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리라. 오인태의 이 진솔함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은 우리가 일찍이 보았던 이 세상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그렇지 않고서는 일관되게 자기 자신의 부끄러움을 고백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해방공간의 현실주의 시인들이 자기비판을 통해 ‘새조국 건설’을 외쳤던 사실은 우리가 익히 아는 바가 아니던가. 무릇 거기에는 쓰라린 고통이 동반한다. 그것은 40이라는 통과제의와도 같은 것이다. 우리가 이 시집을 읽으면서 집요한 그의 사랑노래가 아리게 와 닿는 까닭도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리라. 말하자면 ‘구절초’ 꽃 하나에도 가슴 아파할 줄 아는 그는 참 여린 감성의 소유자임에 틀림없다. 그 여린 감성을 담백하게 그려놓기란 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또한 잘 알고 있다. 

     

     

       사연 없이 피는 꽃이 어디 있겠냐만
       하필 마음 여린 이 시절에 어쩌자고
       구구절절 피어서 사람의 발목을 붙드느냐.
       여름내 얼마나 속끓이며
       이불자락을 흥건히 적셨길래
       마른 자국마다 눈물꽃이 피어
       사람의 가슴을 아프게 치대느냐.
       꽃이나 사람이나 사는 일이
       이렇듯 다 구구절절 소금 같은 일인 걸
       아, 구절초 흩뿌려져 쓰라린 날
       독한 술 한 잔 가슴에 붓고 싶은 날
         -「구절초」전문

     

       3.

      시집 『등뒤의 사랑』을 읽고 나서 오인태라는 한 시인에 대한 또 다른 색감의 판화 한 장을 가슴에 새겨 놓았다. 불혹(不惑)에 깨달은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애절하게 아로새긴 원색의 판화를 앞에 놓고 오늘 밤 투명한 소주 몇 잔 기울이고 싶다.

      내 가슴에 ‘아프게 치대는’ 그의 시편들에서 남해 바다의 짙은 갯내음을 맡는다. 어쩌면 그것은 젊은 날 그가 맡은 묘령의 여자 속살냄새일지도 모른다. 내가 오인태보다 두어 살 많은 나이지만 이토록 사랑하는 법을 아직 깨닫지 못했다.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것은 내게도, 아니 불혹의 나이라면 누구에게나 ‘등뒤의 사랑’이 없으랴. 문제는 그는 시인이고, 시인이 이 시대에 무엇을 노래해야 하는가를 적지 않게 고민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렇다. 그의 말대로라면 상처받지 않은 사랑은 없다. 아니 상처를 받았기에 그 사랑이 더욱 애절하고, 구구절절 우리의 가슴을 뒤흔들어 놓는 것이리라. 그는 ‘풀벌레들은 하필 이 여름에 / 저렇듯 처절하게 우는지를 / 모르시거든 사랑을 함부로 // 떠들지 마라’(「여름꽃」)고 하였다. 그것은 그가 이미 그 이치를 용케 터득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봄날 나의 비좁은 공부방 너머 무논에서는 개구리 울음소리가 한창이다. 내 어릴 적 아홉 살 누이가 불던 고무꽈리소리 닮은 저 왁자한 울음소리가 지닌 이치는 나는 아직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시인이라 자칭하면서도‘사랑’이라는 시어를 여태 한 번도 써먹지(?) 못하고 살아왔다.

      오인태의 세 번째 시집 『등뒤의 사랑』을 읽으면서 남의 일 같지 않은 불혹의 사랑노래를 내 언제 불러볼 수 있을지 생각한다. 내 한 평생 이 노래를 부르지 못해도 좋다. 그는 우리를 대신해 이 노래를 불렀을 터이고, 그렇다면 우리가 또 다시 ‘불혹의 사랑’ 때문에 애절해하거나 구구절절 마음 아파할 이유는 없다. 그저 감탄할 뿐이고 부러워하며 하룻밤 그의 아름다운 판화 속에 묶여 있어도 좋다.

      다가오는 이번 여름에는 구절초 지천으로 꽃 피운 우포에서 그를 만나 밤새 소줏잔을 나누고 싶다. 만나서 이 불혹의 부끄러운 사랑노래를 그와 함께 낮게낮게 불러보고 싶다. 그것이 트로트라면 어떻고, 뽕짝이라면 또 어떠랴. -『경남작가』



     




    ▣ 작가의 말

    너무 대책없이
    벌여놓기만 하면서 살아왔다.
    천년 만년 머무를 것도 아닌데······
    이제, 정말 좋은 선생만 되고 싶다.
    그리고 하나쯤 더 욕심을 허락한다면
    아이들에게 보여도 부끄럽지 않은 
    글을 쓰고 싶다.
                    오인태




    ▣ 해설

                들꽃 같은 아름다움과 해일 같은 힘


     

                                                                            배평모(소설가)

     


      나는 소설을 쓰다 막막하면 시를 읽는다. 세련된 언어로 극도의 절제를 다해 쓰여진 함축의 의미를 되새기면서 시를 읽다 보면 섬광처럼 빛나며 날카롭게 의식을 찔러오는 그 무엇을 체험한다. 때로는 내 정신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어떤 힘 때문에 전율을 느낄 때도 있다. 

      들꽃 같은 아름다움과 해일 같은 무서운 힘을 지닌 게 바로 시라고 생각하며 나는 오인태의 시에서 이러한 시의 아름다움과 힘을 느낀다. 그리고 오인태의 시를 읽으면 '섬진강'의 뛰어난 시인 김용택이 생각난다. 김용택의 시가 섬진강의 아름다움과 절망을 극복하는 끈기를 얘기했다면 오인태의 시는 불행했던 시대의 강기슭에서 절망을 딛고 일어서려는 의지를 노래했다. 

      오인태의 시를 얘기하자면 해직교사 오인태의 삶과 이무렵 그의 삶의 반영인 '그곳인들 바람불지 않겠나' 시집의 시편들을 빼놓을 수 없다. 전국의 많은 독자에게 감명을 주며 대단한 반응을 불러일으킨 이 시집 출간 후 벌써 몇 년의 세월이 흐르고, 여러 문예지에 달라진 목소리의 작품들을 선보이고 있지만 오인태를 기억하는 많은 독자들은 새로운 시편들보다 아직 이 시집의 진한 감동에 묶여있는 듯이 보인다. 나 또한 그 울림을 오랫동안 떨칠 수가 없다.


    남아 부끄러움으로 치떨며 살기보다 / 꼿꼿하게 목잘려 가르침이 될 수 있다면 / 얘들  아 / 오늘 해임통지서 앞에서 / 너희들의 선생은 교직생활 처음으로 / 마음이 가벼울 수 있겠구나.< '해임통지서를 받고'의 일부>

     


      가르치던 아이들에겐 진정한 자기고백인 동시에 부조리한 교육현실에 대해서는 통렬한 질타를 던지고 있는 시다. 그러나 이러한 자기고백과 포효 뒤에는 시인의 가슴아픈 가정사가 숨어 있어 읽는 이들의 눈시울을 붉게 한다.

     


    주린 배 험한 병 숨겨가며 / 대학까지 보내 /' 선생질이라도 시켜놓았더니 / 살아 '선생에미' 자랑 / 삼년을 못채우고 / 죽어 '선생자식' 단 한 번 덕 입어 / 고향 산에 묻힌 뿌듯함 / 그 자리 삼년을 못 지켜 주는구나 < '어머니의 무덤에서' 일부>


      오인태의 시는 왠만한 담시만큼이나 호흡이 길다. 그러나 운율에서 전혀 어색함을 느끼지 못한다. 그만큼 시어의 구사력이 능란하고 시의 호흡이 안정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며(참고로 얘기하면 오인태는 이미 고등학교 다닐 때 3년간을 문예특기장학생으로 지내며 문학적 자질을 연마하고, 대학 때는 개천예술제 백일장에서 장원을 차지하여 문명을 드날린 이력을 갖고 있다), 그래서 '섬진강'의 시인 김용택이 생각났는지 모른다. 그러나 때로는 절제된 짧은 시어 속에 메시지의 핵심을 담아내는 놀라운 시적 형상력에서 오인태 시의 저력을 실감하며, 그 신뢰에 한층 무게를 보태주게 된다.

     


    길가에나 묵정밭 / 더러는 쇠똥무덤 돌틈새 / 찰싹 몸붙이고 있다가 / 일제히 고개 들고 일어나 / 세상을 하얗게 덮어버리는 / 혼자서는 작은 꽃 / 어우러져서 큰 꽃< '냉이꽃' 전문>

      민중의 속성과 사회변혁의 염원을 불과 일곱 행 밖에 되지 않는 짧은 시 속에 이처럼 함축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은 경이스럽다. ' 혼자서는 작은 꽃 / 어우러져서 큰 꽃' 어디 몇 페이지에 이르는 산문이 이만큼의 깊은 메시지와 감동을 줄 수 있을까

      80년대 말 혹은 90년대 초, 사회변혁에 대한 열정으로 시의 시대를 구가하던 많은 민족 민중시인들의 목소리가 잦아든 요즘 오인태는 그래도 이런 저런 지면에 작품을 선보이며 시인으로서의 존재를 알리고 있다. 그러나 그의 시에도 시대의 좌절과 실의가 내면의 의식에 젖어든 채 관념성을 띠고 있어, 이전의 생생한 리얼리티에서는 다소 멀어진 경향을 보인다..

     


    물은 저녁까지 차오르고 / 위천천 아월천 만나 이루는/ 대야리 황강 흐름도 잠겼다. / 한 철 요행이라도 거둘까 / 심어놓은 무, 배추 / 그 부질없는 꿈의 / 머리끝도 보이지 않는다. / 끝내 떠나지 못하고 / 아슬아슬한 기슭에 / 달팽이처럼 붙어 / 버텨사는 가구 몇 / 시름도 잠겨 / 오늘밤 대야리엔 / 불빛 하나 / 빛나지 않는다.<대야리에서.3 전문>


      오인태의 이전의 시들은 주로 어떤 감동적인 상황을 포착하여 독자에게 그 감동을 그대로 전달해주는 것들이 많았다. 그것은 그만큼 이야기거리가 될 수 있는 치열한 상황 속에서 시인이 살아왔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최영미의 말대로 이젠 치열했던 '서른 잔치'도 끝난 듯이 보이고, 그도 복직해서 교단으로 돌아갔다. 결국 그가 꿈꾸던 시대는 오지 않은 채,

      이 '대야리' 연작시편에는 이러한 시대의 좌절과 실의가 다소 관념화된 시어로 표출되고 있다. 그러나 그의 발은 여전히 '대야리'라는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떠나지 못하고 있다. 머리와 가슴으로는 홀로 절망과 그리움을 앓으면서 말이다. 그의 관념은 이런 절망과 그리움의 편린이리라. 그러나 그 관념은 너절하게 남발되지 않고, 구체적인 시어들에 의해 적절히 통제되어 오히려 시의 깊이와 넓이를 더해주는 구실을 한다. 이는 오인태가 그만큼 성숙해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픔을 통해서,


     

    잠긴다는 것이 슬픔이 아니라 / 잠겨서 잊혀져 간다는 일이 슬픈 것. / 마을을 묻은 사람들의 사연도 / 잠겨서 언젠가는 잊혀져 갈 것이다. / 잊혀진 대야리 물 위엔 / 함께 잠긴 청동기 시대 / 가야의 유물 같은 낮달 하나 / 전설처럼 떠다닐 것이다. / 살다 죽는 일도 이와 같은 것. / 저 산비알의 나무덤불 / 조그맣게 돋아 반짝거리는 / 들풀 한 포기 밑에도 / 아득하게 묻힌 이름들 몇이랴. / 먼 훗날 잊혀진 내 이름 위에도 / 풀꽃 하나 무심히 피어날까. / 대야리, 여기서는 늘 / 산다는 일의 부질없음 함께 / 때론 자갈돌처럼 하얗게 / 드러나는 희망 또한 / 버릴 수 없음이니 / 오늘은 잠겨서, / 잠긴 대로 / 대야리 물같이 / 흐를 일이다. (대야리에서 4.전문)

      눈물을 쏟고 난 뒤의 개운함, 혹은 달관의 미학을 보여주는 시다. 격랑이 지나간 잠잠한 물 속에 비치는 하얀 자갈돌, 그 자갈돌같이 눈부신 시를 앞으로도 우리는 오인태에게서 기대해도 좋으리라. 그는 자갈돌처럼 단단한 시인이기 때문이다.



    ▣ 단평

    * 해직교사, 지역언론인, 사회운동가 등 다양한 경력으로 우리 사회의 변혁운동에 투사로 앞장서 온 그이지만 실상 아직도 내게 오인태의 이미지는 섬세한 감각을 지닌 시인이자, 순수한 마음으로 아이들을 사랑하는 초등학교 선생님에 더 가깝다. 이 시집에서 나는 그것을 다시금 확인한다. - 김태수(시인)


    * 이제까지 오인태의 시는 여럿이 모여 있는 사람들을 향해 나아가는 시였으나, 이 시집에서는 혼자 외따로 떨어져 있는 '나'에게로 돌아오는 시로 변모하고 있다. 그 변모의 원인은 두말할 것도 없이 어떤 식으로든 세상이 바뀌었다는 시인의 인식 때문이다. 그런데 시인은 세상의 발빠른 변화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오히려 가슴 아파한다. 나는 이 시집을 읽으며 오인태가 비로소 외로운 섬이 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그게 그의 시를 더욱 풍성하게 살찌우리라 예감한다. 외로움이 썩고 그 위에 맑고 감동적인 물이 고이게 될 날을 기다린다. -안도현(시인)


    * 잔치 끝난 자리에 남아 혼자 밥을 먹고 있는 오인태의 외로움과 번민을 읽는다. 그러면서 나도 지금 울컥 목이 메인다. -김기홍(시인)




     

 

    ▣ 작가의 말

    참으로 긴 기간 동안의 게으름을 정리하고 뒤돌아보니 부끄럽기 짝이 없다. 묵은 짐을 벗고 새로운 길찾기의 계기를 삼고자 하는 것이었지만 내 '부끄러움'을 다 드러내보인다고 생각하니 또 망설여진다. 그러나 어쩌랴. 툴툴 털고 가는 수밖에.

    늘 내 시가 모순과 부조리에 찬 이 땅에 바늘 하나 꽂는 자극이라도 되고 한 톨의 밥알, 희망이 되기를 바라지만 어디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겠는가. 그렇다고 또 쉽게 포기할 수 있는 일이기는 한가?

    고난에 찬 이 시대 교사의 길을 인내와 사랑과 투쟁으로 꿋꿋이 지키고 계시는 많은 선생님들 그리고 이제는 중학생, 고등학생, 대학생이 되어 있을 나의 아이들, 또 더 많은 고맙고 죄송스러운 분들을 생각하며.

    때 아닌 봄나절의 호우주의보, 그러나 오늘 멀리서의 약속을 위해 길을 떠나야 한다.

     

              오월 뜨거운 비 내리는 날에
                                                           오인태



     

    ▣ 해설

             좀더 나은 미래에 가 닿기 위한 길 찾기


                                                                        

                                                                          김태수(시인)


       Ⅰ.


      오인태 시인과 나의 첫 만남은 1981년 경남 통영에 위치한 사량도의 궁벽한 어촌 학교에서였다. 그때 그는 진주교육대학 1학년에 재학 중이었으며 학보사 기자로서 문학에 대한 대단한 열정을 지니고 있었다. 우리는 밤늦도록 바닷가에 앉아 소주잔을 놓고 당시 문학의 제반 상황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문예특기 장학생으로 크고 작은 백일장을 휩쓸고 다녔던 그는 대학 1년생답지 않은 폭넓고 당찬 문학관을 피력했던 것으로 지금 기억된다.

      그 후 그는 대학 2학년 때 개천예술제에서 '역사'라는 시로써 장원을 하였으며 신문에 발표된 그 시를 보고 '아하 이 친구 대단한 시인이 될 자질을 갖고 있구나' 다시금 확인하게 되었는데 이제 당당한 시인이 된 그의 첫 시집 발문을 내가 쓰게 되다니.

      오인태 시인은 91년『녹두꽃』이라는 진보적 문예지에 「신원에서」외 3편의 시를 발표함으로써 문단에 나와 이미 가능성 있는 젊은 시인으로 주목받고 있다. 데뷔한 지 일 년이 채 안 돼 첫 시집을 묶어냄을 보아서도 그 역량과 문학적 열정을 가히 짐작할 수 있겠다.

      '그곳인들 바람 불지 않겠나'라는 제목의 이 시집의 원고들을 읽으면서 나는 이 시집의 묶음이 오인태 인생의 한 묶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누구나 그러하겠지만). 4부, 2부, 1부, 3부의 순으로 이어지는 이 시편들은 그의 인생역정을 그대로 뚜렷이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그의 문학은 그의 삶에서 떼어놓을 수 없는 삶의 문학이 되어 있다. 그의 경험의 실체가 곧 그의 시의 실체다. 오인태 시인의 시에서 '∼에서, ∼을 하며'가 유난히 눈에 많이 띄는 것도 바로 이 경험의 현장성 때문일 것이다.

      언젠가 그가 문학과 삶의 치열성을 얘기하면서 그의 삶의 농도만큼의 농도를 가진 시를 쓸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했던 기억이 난다. 결국 치열한 삶을 살지 않고서는 치열한 시를 쓸 수 없다는 얘기겠다.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하면서 삶의 치열성으로 문학의 치열성을 획득하고 있는, 그래서 감동으로 읽히는 이 젊은 시인의 시를 독자에게 소개하는 일은 나로서는 분명 큰 기쁨임에 틀림없다. 그러면 앞서 얘기한 대로의 순서에 의한 그의 인생역정을 좇아 가장 먼저 쓰여진 4부의 작품부터 살펴보기로 하겠다.


       Ⅱ.


      4부의 제목이 암시하듯 참으로 그 시절은 암담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전두환씨가 이끄는 군부세력이 광주를 총칼로 뭉개고 국보위라는 초법적인 기구를 만들어 민주양심인사들을 대거 묶어 가두었으며 허수아비집단에 의한 합법을 위장, 정권을 탈취함으로써 부풀어오르던 서울의 봄을 허무하게 결단냈다. 억압과 공포의 어둠이 거리마다 끈적거렸고, 대학가 또한 예외일 수 없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그는 당차게도 예리한 칼날 하나 벼리고 있었으니,

     

     

       말 잃은 이 땅의 시인을 만나자
       그리고 바람이 시퍼렇게 날 세우는 영토에 서자
       다시 북소리 드높던 옛 성곽
       거룩한 피의 의미를 생각할 때다
       이 시대 우리들 진실 혹은 믿음은
       미친 칼날바람에 지느러미를 잘리우고
       내내 얌전히 잠재우던 아픈 기억들
       침묵의 강물은 그친 것이 아니라
       해일을 몰고 오기 위한 징조의 모음이다
       누웠던 풀들 일어서고
       잠들던 파도 날 세우고
       백골의 나무들 귀 열어서
       다시

       이 시대 말 잃은 시인을 만나자
          -「역사」전문
     

       시「역사」는 시대의 비겁한 시인들에 대한 질책의 언어로 번뜩인다. 연약한 여성인 논개가 왜장의 목을 껴안고 남강 푸른 물에 몸을 던질 때, 실천유학의 거두 남명 조식의 문하생들이 왜적을 맞아 결사투쟁으로 피를 흘릴 때, 탁상 유학자들은 풍전 등화의 국가 위기 상황 아래서도 번지레한 헛문구의 상소문 경쟁과 당파싸움으로 일관하고 있었음을 우리는 안다. 그 더러운 피내림으로 80년대 초 일군의 시인들이 양심의 펜을 갈아 군정의 부당성을 공격하다 투옥되어 쓰러질 때, 또한 일군의 무리들은 정권에 아부하면서 역한 화장끼, 화냥끼 있는 시들을 양산해 대중의 의식을 흐리고 있었음도 안다. 그는 이 시를 통해 진실과 믿음의 지느러미를 싹둑싹둑 자르는 시대상황과 거기에 침묵하는 시인(지식인)들에 대해 역사의식의 각성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때 절은 설움 같은 건
       툴툴 먼지로 털어 버리고
       가자 겨울산
       칡넝쿨이나 잡고 오르면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세상은 한낱 굿판 같은 것일까
       막소주 댓 잔에 내장
       뒤틀리는 속앓이
       꿈결에도 목이 타는 갈증으로
       됫박이나 마셔댄 새벽 냉수에
       또다시 배앓이를 해야 하는
       이 시대 우리들의 아픔은
       엄살일까 투정으로나 볼까
       망나니 칼날바람에 허리 시린 잡목
       여자는 허리를 따뜻하게 해야 한단다
       소한까지 넘기고 몇 만 원 받는 월급날
       사주팔자에도 없는 연탄 몇 장 사 들인 죄로
       손바닥만한 온기에 누워 죽어간 누이야
       우리는 내내 이렇게 부끄러이 살아서
       씻을 수 있을까 황천 가는 개울물에
       발이나 씻을 수 있을까
       빈 맘 달래어 길을 오르면
       그대 무덤 없는 혼령을 위해
       노승의 목탁 속에는
       눈이나 내릴까
      -「겨울 산사 가는 길」전문

     

     

      그러나 그는 83년 2월 교대를 졸업하고 착실한(?) 그의 동료들이 발령을 받아 학교로 나간데 비해 미발령 상태로 남아 이농의 도회에서 이 회사 저 공장을 전전하며, '여교사 출산한 뒤치다꺼리나 하는' 임시교사로 3개군 5개 학교를 떠다니며, 자조와 실의의 세월을 보낸다. 위 시「겨울 산사 가는 길」이나 「2월 남해에서」, 「이 겨울의 끝이나 지키며」, 「보름제」등에서처럼 혹한의 계절, 빙벽의 계절, 억압의 정치상황으로 상징되는 계절, 개인적으로는 미발령이 장기화된 우울한 계절, 그 겨울 속에서 '황천 가는 개울물에 발조차 씻을 수 없을 것'이라는 극한적인 자조와 허무의 몸살을 앓지만 결국 「겨울 낙동강에서」의 '…그래 우리에겐 아직 저 뜨거운/눈발 같은 그리움 있었구나/ 쇠사슬로도 묶지 못하는/혹은 이 시대 그 서슬 퍼런/ 칼날로도 베지 못하는/아아 강물 같은/사랑이 있었구나'처럼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건강성으로 일어선다.

      그 당시 아무런 고민이나 갈등도 없이 '등 따숩고 배부르면 그만'이라는 안일한 생각을 하는 수많은 족속들 속에서 수없이 고민하고 아파하고 때로 절망했던 그가 그것에 함몰되지 않고 새로운 희망으로 힘차게 걸어가 훌륭한 교사로, 교육운동가로, 시인으로 서게 되리라는 것을 추측하기란 어렵지 않다. 나중에 그의 시편들에 반영되는 대로 실의에 빠져 보지 않은 사람이 무슨 절실한 의지를, 절망에 빠져 보지 않은 사람이 무슨 절실한 희망을 가질 수 있겠는가. 

     

     


       Ⅲ.


      오인태의 시의 걸음은 '2부 「꽃씨를 따며」'에서 좀더 구체화된다. 이미 그는 「부임기」에서처럼 교사가 되어 있었고 부패한 교육 현실 속에서 스스로 가야 할 길이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하게 된다.

      권위와 획일적인 통제로 특징지어지는 일제의 교육풍조가 그대로 연장된 학교의 분위기 속에서 「장학지도 나오는 날」이 그가 편집인으로 있던 『들풀』이라는 동인지에 발표되고 교육관료들의 감시의 눈초리와 공격의 화살이 집중되면서 그는 본격적으로 시라는 총구를 교육계의 전반적인 모순과 부조리 쪽으로 정조준 하는 계기를 맞는다. 거창 교사협의회 창립 초기부터 핵심적으로 참여했던 그는 좀더 나은 미래교육을 위한 실천적 노력을 기울이면서 구시대 낡은 교육의 벽에 맞서 온몸으로 싸워 나가게 되는 것이다. 참으로 운이 없게도(?) 나는 이 와중에서 마산생활을 청산하고 거창으로 직장을 옮겨 그로 하여 더욱 엄청난 고뇌를 느끼게 되었으니,

     
      <생략>
       너희들이 하나 둘 떠날수록
       우리들의 교실은
       더욱 서구형 교실에 가까워지고
       이왕에 만신창이가 된 출석부
       까짓 붉은 줄 하나만
       더 그어 버리면 그만이지.
    
       <생략>
       너희들을 보낼 때면
       너희들 이름을 하나씩 지워 가는
       출석부의 붉은 줄보다도
       더 선명하게 가슴에 각인되는
       이 슬픔은 어디에서 오는 것이냐
       그나마 떠나지 못하는
       못난 부모들 때문에
       이렇게 남아서
       보내는 슬픔만 쌓아 가는
       아이들을 데리고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오르간을 타면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진달래
       삐걱거리는 고향의 봄을 타면
       기어이 떠나지 못한
       내 생애 또 한 해의 봄이
       살피재 황사바람
       소울음으로 운다.
          -「또 한 아이를 보내며」일부

     

      위의 시에서 나타나듯 이미 농촌현실은 기울대로 기울어 조금 가진 자들은 소규모 학교 또는 복식수업을 피해 전학을 무더기로 하였으며 피폐된 농촌에서 살길을 잃고 뿌리를 뽑힌 일부 농민들은 살길을 찾아 도회로, 도회로 떠나고 있었다. 그의 가슴속에 텅 빈자리 하나가 늘어갈 때마다 남은 아이들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의무감이 빈자리를 메꾸게 되며 더 나은 교육에로의 집념을 가짐으로써 그 설움을 극복해 내려는 강한 의지를 지니게 된다.

      역시 그도 농촌출신의 교사로서 농촌현실의 아픔 속에서 쉬 떠나지 못하는 무기력과 어리석음을 되뇌이고 있지만, 사실 내가 보건대 오인태는 매우 정열적이고 헌신적인 교사였음에 틀림없었다. 근래 교육시라고 하여 많은 교사시인들이 시를 써오고 있으나 대부분의 시들이 너무 교육현실을 강렬히 투시함으로써 독자가 접하기 전에 이미 스스로 압도되어 자기도취에 빠져 있기 십상이었다. 교육시가 가져야 할 현장체험의 구체성에 의한 호소력·탄력성의 형상화에 실패하고 높은 목소리로 오히려 교육현실의 절박함을 반감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에 반해 위「또 한 아이를 보내며」나 '아무도 말이 없었다. 그 해 늦가을/어둑발이 내릴 때까지 꽃씨를 따며'로 시작해서 '성급하게 내리는 늦가을 어둑발/씨앗의 외피처럼/단단해진 어둠이 우리를 에워쌌고/어둠의 안에서/우리는 또 다른 어둠을/꽃씨와 함께 밀봉하며/봉해지는 봉지처럼/아무도 말이 없었다.'로 맺어지는「꽃씨를 따며」등의 시편들은 담담한 어조 속에서도 읽는 이로 하여금 부조리하고 모순에 찬 교육현실을 더욱 강하게 절감케 하는 호소력을 가지고 다가선다.

      교육시의 높은 차원과 바람직한 전형을 이들 작품들은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그의 교육현실에 대한 고뇌와 저항의 몸부림은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의 적극적인 조합원이 되게 하고, 뜨거운 가슴과 온몸으로, 부조리한 교육모순을 혁파하고자 했던, 그것의 시화를 통해 사회에 고발하고자 했던 그는 결국 해직교사의 대열에 낀 채 교단을 쫓겨 나와 아픈 해직의 시편들을 쓰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Ⅳ. 
    
       너에게는 참 할말이 없다.
       위로 누나 넷으로 늦본 맏이 그늘에 묻혀
       입는 것 하나 제대로 네 몫으로 산 것 없고
       먹는 것 하나 따뜻하게 네 것으로
       챙겨진 일 없던 아우야
       형이 네가 못 나온 고등학교를 나오고
       값싼 교육대학이나마 졸업한 것은
       누나들이 그랬던 것처럼
       보리밥으로 덮은 형의 쌀밥 도시락과
       쌀밥으로 덮은 네 보리밥 도시락의 차이를
       묵묵히 눈물로 삼켰을 아픈 인내와
       희생의 대가임을 이 형인들 모를까
       네가 책가방보다 또래들의
       주먹다짐에나 어울리고
       어렵게 입학한 공고를 몇 달만에
       네 말대로 때려치우고 나온 것도
       아우야 이 형은 네 속 깊은 마음을
       두려움으로 간직하고 있다.
       그런 형이 네게는 사치스런
       구호로 들릴지 모를
       '교육민주화'니 '정의'니 '양심'이니 하며
       식구들을 굶주림과 눈물과
       끝내는 어머니의 죽음으로 바꾼
       교단을 쫓겨 나와 너를 대하던 날
       한마디 말없이 지켜보던 네 눈빛이
       '차비나 하라'며 쥐어 주던 지폐 몇 장이
       돌아오는 찻길 내내 칼날바람 되어
       가슴 도려지고 너에게는 참 할말이 없다
       미루나무 그림자 속으로 멀어지며
       돌아보는 눈길 몇 번이나 마주치던
       아우야
         -「아우에게」전문

     

      해직의 시편들에 해당하는 이 시집의 1부 작품들은 해직의 아픔을 자연과 가족사에 묘하게 결합, 그것을 교육의 문제에 묶어 두지 않고 독자의 보편적 경험에 가 닿게 함으로써 교사가 아닌 누구에게도 진한 감동으로 읽히게 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오인태의 교육시가 단순한 교육시에 머무르지 않고 그것을 뛰어넘어 보다 확장된 영역을 성공적으로 확보하는 비결이 아닌가 생각한다.「아우에게」도 가난한 집안의 장남으로서 역할을 다하지 못한 스스로의 죄의식과 자괴심을 아우에게 토로하는 화법으로 해직의 아픔을 그리고 있다. 차비나 하라며 쥐어준 만원 권 지폐 몇 장을 받아들고 떠나는 버스 차창에서 연신 뒤돌아보며 가슴 저몄을 형제들이, 그 아픔이 어찌 이들뿐이겠는가.‘이 땅 수천의 선생의 가슴에 못질한 사람/ 이 땅 수만의 부모의 가슴에 못질한 사람/이 땅 수십만의 가슴에 못질한 사람...' 그들은 이런 아픔을 알기나 하는지,

     

     

       오늘은 3월 2일
       겨울방학 마치고 개학하는 날
       늘 그랬던 것처럼
       설레임 안고 집을 나선다
       몇 학년 담임을 맡을까
       교실은 어디, 시업식 마치고는
       청소를 해야지 훌훌
       겨울먼지 털어
       커튼도 씻고 봄 물이끼 돋은
       돌멩이로 어항도 꾸미고
       어항도 꾸미고, 그렇구나
       우리는 이렇게 어항 바깥에서
       서로 마주보며 꿈꿀 수밖에 없어
       다가갈수록 멀리 있는 그리움
       차창 밖으로나 그 모습 훔치며
       빗길 속으로 내몰린다 멀리
       남원 거쳐 전주 더 멀리
       대전 지나 대둔산을 오르며
       여기에도 골짝 골짝마다
       학교는 있고
       내 아이들 같은 아이들
       똑같은 교문
       그만그만한 운동장
       펄럭이는 태극기
       모두 그 자리에 있는데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가고 있는가 지금은 봄
       사방 잡목림 속눈 틔울 꿈으로
       연둣빛 도는데
       아아 돌아갈 데 없는
       내 봄은 아직 겨울이다
       겨울이다
         -「개학하는 날에」전문

     

     

      결국 그는 타의에 의해 교직을 떠났지만 학교를 지날 때마다 가슴에 소용돌이치는 학교와 아이들에 대한 그리움을 앓는다.「봄날 사랑노래」, 「그리운 이름 다시 부르며」, 「목련」, 「스승의 날에」등의 시를 쓰면서 가슴 솟구치는 눈물 몇 낱 떨구었을 것을 나 또한 뜨거워지는 눈시울로 짐작한다.

     

     

       그곳인들 바람 불지 않겠나
       이 사람 친구 박 선생
       가슴이 뜨겁고 달변이던 자네가
       전교조 탈퇴서를 쓴 이후
       말을 잃고 모임에도 보이질 않더니
       결국 섬으로 들어갔다는 소문 들으며
       젖어 오네. 자네 외로움과 분노
       발 담그고 있을 바닷가 파도로

     

       <생략>

       어디 그곳인들 바람 불지 않겠나
       더 큰 바람 더 큰 파도에
       몸부림치고 있을
       이 사람 내 친구 박 선생
         -「그곳인들 바람 불지 않겠나」 일부

     

      단지 그의 친구 박 선생뿐 아니라 얼마나 많은 이 땅의 선생들이 더 큰 바람 더 큰 파도에 몸부림치고 있을 것인가. 이러한 몸부림이 결국은 이 모순에 가득찬 교육현실을 혁파하고 참교육의 그 날을 앞당기는 원동력이 될 것임을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Ⅴ.

     

      오인태는 최근에 쓴 '3부 「냉이꽃」' 등의 시들을 통해 역사현실에 좀더 가까이 가고자 한다. 교육운동가로서, 시인으로서 시대변혁에 대한 희망과 낙관적 전망을 표출하고 있으며 앞으로 그의 시들은 이런 역사적 사실에 깊이 천착하리라 짐작한다.

      앞에서 오인태의 시들을 그의 생애사적으로 개략해 보았다. 그는 열정적으로 시대의 모순과 암담한 사회현실에 저항해 왔으며, 좀더 나은 시대를 바라는 그 몸부림을 시집 전편으로 보여 주었다. 앞으로도 그의 시는, 또 그의 삶은 늘 진정한 사랑이 존재하는 아름다운 세상으로 나아가는 길 찾기의 앞장에 서 있을 것이다. 훌륭한 시인으로서, 교사로서, 운동가로서.

      그러기 위해서 그는 좀더 조화로운 충돌과 갈등의 해소를 위해 고뇌해야 할 것이며 부패한 사회현실의 정수리를 찌르는 좀더 강력하고도 용의주도한 언어구사력을 습득해야 할 과제를 스스로 떠안아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만약 부끄러운 이 글이 이 시집의 작품들에 앞서 읽혀서 오인태 시를 이해하는 선입견으로 작용한다면 그것은 이 글을 쓰는 나에게 있어서나 시인에게 있어서나 독자에게 있어서도 전혀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덧붙이면서 이 시집의 시들에 대한 매우 자유스러운 수용 있기를 바란다. 가능성 있는 젊은 시인 오인태, 그에 대한 끊임없는 채찍과 애정을 위해.

      아이들에게 돌아가 환히 웃음짓는 이 땅 수많은 해직교사들의 밝은 날을 빌며 그의 가장 짧은, 그러나 그의 희망처럼 단단한 시를 끝에 붙이는 것으로 이 글을 맺는다.
     

       길가에나 묵정밭
       더러는 쇠똥무덤 돌틈새
       찰싹 몸 붙이고 있다가
       일제히 고개 들고 일어나
       세상을 하얗게 덮어 버리는
       혼자서는 작은 꽃
       어우러져서 큰 꽃
          -「냉이꽃 1 」전문



    ▣ 단평

    * 해직교사들의 아픔은 단순히 해직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선생님이 아니고서는 느낄 수 없는 아이들에 대한 그리움, 교단에 다시 서고픈 갈망과 가르침에 대한 욕구는 채워지지 않는 사랑의 크나큰 공허와 같은 것이다. 하나의 그리움이 수천 가지의 그리움으로 절절하게 다가오는 시편들을 우리는 오인태 선생의 시에서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절망의 잔뿌리가 억센 희망의 꽃으로 다시 자라나리라는 확신과 함께 우리의 가슴을 잔잔히 물살지게 한다. 오인태 선생의 시에서 이 땅의 교육시가 한 단계 성큼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과 구체적인 감동으로 자리잡아 가는 튼튼한 모습을 동시에 느낄 수가 있다.

                                                                                            - 도종환(시인)

    * 나는 이 시집을 읽는 동안 가슴 저 밑바닥에서부터 북받쳐 오르는 울음 덩어리를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여교사 머리채를 질질 끌고 가다가 군화발로 짓밟고 어린 제자들이 보는 눈앞에서 스승의 손목에 쇠고랑을 채운 장본인이 국무총리로 앉아 있는 이 나라 정권의 정당성이나 도덕성에 대해 나는 충성도 박수도 보낼 수가 없다. 사랑하는 어린 풀들이 조국의 대지에 깊은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 우리 교육동지들은 교육민주화의 푸른 깃발을 드높이 치켜들어야 한다. 빛나라 민족 교육이여!

                                                                                      - 신경득(문학평론가)

    <감상문>
    * 그리움에 낮게/ 흐느껴 본 사람만이/ 볼 수 있으리라 냉이꽃/ 엎드려 고개 숙이면/ 낮은 자리 거기/ 그리움이 또 하나의/ 그리움을 불러 마침내/ 수천 수만의 그리움이/ 함께 손잡아/ 질긴 사랑으로 어우러진/ 냉이꽃 볼 수 있으리라/ 수렁처럼 절망해 본/ 사람만이 볼 수 있으리라/ 엎어지고 밟혀/ 마침내 절망의 끝에서/ 절망의 뿌리까지 손톱으로/ 파헤치다 보면 거기/ 하나의 절망이 수많은/ 절망의 잔뿌리를 뻗쳐/ 서로 일으켜 세우는 봄/ 억센 희망으로 피어있는/ 냉이꽃 볼 수 있으리라(냉이꽃 3. 오인태)

    ‘냉이꽃… 냉이꽃이… 어떻게 생긴 꽃이지…’ 처음 이 시를 읽었을 때는 냉이꽃의 이미지를 퍼뜩 떠올릴 수 없었다. 내게 익숙한 꽃이라고 해봐야 장미, 튤립, 프리지어 정도의 화려하고 잘 알려진 외래종 몇 가지가 전부였다. 그러니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고서는 꽃인지 잡초인지 분간조차 힘든 냉이꽃을 어떻게 떠올릴 수 있었겠는가 컴퓨터로 냉이꽃의 사진을 한참이나 둘러보고 나서야 비로소 하얀 좁쌀을 그보다 더 좁쌀만 하게 부수어 흩뿌려 놓은 듯, 봄이면 어디서건 지천으로 피어나던 소담스러운 모습의 냉이꽃을 기억해 낼 수 있었다.

    그렇게 냉이꽃을 알게 된 후에(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이 ‘냉이꽃’이었음을 알게 된 후에) 다시 시를 읽으니 새로운 느낌이 들었다.

    시인이 냉이꽃을 소재로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어렴풋이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냉이꽃은 작고 여리며 약한 존재다. 그러나 온갖 시련과 어려움 속에서도 서로를 의지하여 억센 희망으로 피어난다.

    사람은 분명 여리고 약한 존재다. 그렇지만 절망과 고통은 딱 견딜 수 있을 만큼만 주어지기에 포기하지 않고 서로를 의지하면서 살아간다. 시인은 이렇게 냉이꽃과 사람이 닮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시인 역시 냉이꽃 같은 삶을 살아온 사람이 아니었을까.

    가끔 시나 소설, 에세이 같은 것들을 읽다보면 그 저자가 어떤 사람일까 궁금해질 때가 있다. 박완서님과 이철환님이 그러했으며, 원성 스님과 류시화님이 그러했다.

    헤르만 헤세와 릴케가 그러했는데 오인태님도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진다. 책 속에서 그분들은 언제나 나직하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도란도란 말씀해 주신다.

    산다는 것, 사랑한다는 것, 꿈꾼다는 것에 대해서. 오늘 밤에는 오인태님의 냉이꽃을 읽으며, 아니 오인태 시인의 이야기를 들으며 잠이 들 것 같다.

                                                      - [한겨레] 박현주/울산 신선여고 1학년

     

 

 

출처 : 시야, 밥 먹고 놀자!
글쓴이 : 촛불시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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