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유현의 미학- 말똥 한 덩이/공광규
유현의 미학
- 『말똥 한 덩이』(실천문학사, 2008)
- 공광규
마침 이 글을 쓰고 있는데 창 밖에 폭설이 내린다. 이미 남쪽 지방은 폭설이 내려 피해가 많다는 소식이다. 시집에 실린 50편의 시 가운데 어떤 시를 고를까 고민할 필요 없이 시집의 첫 시 「폭설」을 소개해야겠다.
술집과 노래방을 거친
늦은 귀가길
나는 불경하게도
이웃집 여자가 보고 싶다
그래도 이런 나를
하느님은 사랑하시는지
내 발자국을 따라오시며
자꾸자꾸 폭설로 지워주신다
「폭설」의 전문이다. 작년인가 제 작년 겨울이 끝나갈 무렵에 쓴 시이다. 사실은 그날 습설이 내렸다. 습설(濕雪)은 기온이 낮을 때 내리는 눈으로 습기가 많은 축축한 눈이다. 사무실 직원들과 무교동 술집에서 놀다가 밤늦게 귀가를 하는 날이었다. 어찌된 술 문화인지 대개 저녁을 먹고도 술집을 2차 3차 가는 것이 다반사였다.
마지막 전철로 집에 들어오다가 깜박 조는 바람에 백석역에서 내리지 못하고 한 정거장을 지나 마두역에 내렸다. 백석역이나 마두역이나 아파트와의 거리가 비슷하나 마두역에 내릴 경우 건널목과 오르내리는 구름다리가 두 개나 있어서 귀찮다. 그래서 평평한 인도를 이용할 수 있는 백석역에서 전철을 타고 내린다. 대신에 마두역 가는 길은 조성이 잘 되어 있는 공원을 지나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어 봄이나 가을에 가끔씩 구경삼아 일부러 다닐 뿐이다.
그날도 밤늦게 귀가를 하는데 공원에 습설이 하얗게 내려 쌓이고, 발자국을 남기며 집을 향해 걸어가는 내 머리 위에도 습설이 쌓였다. 늘 이렇게 살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곤 했지만, 이날은 특히 이렇게 살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신년 초여서 더욱 그랬으리라. 좋아하지도 않는 술집에 있다가 자주 늦은 귀가를 하는 내가 불경한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업무가 끝나면 술집에 몰려가 노닥거리면서 많은 저녁을 보내야 하는 삶이 잘 사는 삶은 아니지 않는가?
독자들은 ‘이웃집 여자’가 궁금할 것이다. 그리고 만나는 사람마다 물어본다. 궁금해 하려면 궁금해 하라. 시집 뒤에 붙은 나의 시론 「양생의 시학」에 답이 있으니.
그런데 이 시와 짝을 이루는 시가 중간쯤에 실린 「제부도에서」이다. 전문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모래톱으로 바다를 온종일 톱질하는
바닷가 목수의 아이가 되고 싶다
갈매기처럼 도요새처럼 까불까불 놀면서
톱밥을 헤쳐 먹이를 줍고 싶다
아침 바다에서 건진 해를 가지고
온종일 공놀이하다 지친 저녁이면
노을로 짠 빨간색 이불을 덮고
말똥말똥 이웃집 여자아이를 생각하고 싶다.
작년 여름 사무실 직원들과 제부도에 가서 얻은 발상이다. 이 시는 앞에 인용한 「폭설」과 짝이 된다. 이건 순전히 우연이다. 앞의 시에서는 “이웃집 여자가 보고 싶다”이고 이 시에서는 “이웃집 여자아이를 생각하고 싶다.”이다. 앞의 경우는 성인의 불경한 삶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고, 뒤의 경우는 어린아이의 천진함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이것들은 앞에 것이든 뒤에 것이든 실제 경험이든 아니든 시를 만들어가면서 문장에 전략적으로 들여온 어휘이다. 그러니 전략적 거짓말인 것이다. 이 전략적 거짓말은 시에서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리고 시인이 치밀하게 전략적 거짓말을 문장 속에 감추었을 때 독자는 속아 넘어가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
이번 시집을 편집한 손택수 시인은 시집 체제를 도시의 삶, 도시와 고향의 경계적 삶, 고향의 기억 순으로 편집하겠다고 제안하였다. 나는 동의했다. 그래서 고향 제재의 시들은 모두 뒤에 배치되어 있다. 이전 시집에도 고향 이야기가 많지만, 이번 시집에도 고향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특히 이번 시집에는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이전 시집과 이 시집을 내는 4년 사이에 어머니가 암 투병을 하시다가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투병과 죽음은 시인에게 일생에서 아주 특별한 경험인 것이다.
그러나 그런 시들은 생략하고 시집의 가장 마지막 시 「모과꽃잎 화문석」을 소개해야겠다.
대밭 그림자가 비질하는
깨끗한 마당에
바람이 연분홍 모과꽃잎 화문석을 짜고 있다
가는귀가 먹은 홀어머니가 쑥차를 내오는데
손톱에 다정이 쑥물 들어
마음도 화문석이다
당산나무 가지를 두드려대는 딱따구리 소리와
꾀꼬리 휘파람 소리가
화문석 위에서 놀고 있다.
지금은 빈집으로 남아있는 고향집에 다니러 갔다가, 시골에서 중학교까지 같이 다닌 부랄 친구 기호의 어머니에게 인사를 드리러가서 얻은 시이다. 대문에 들어서니 흙 마당을 깨끗하게 쓸어놓고 사셨다. 그런데 연분홍 모과꽃잎이 마당에 떨어져 바람에 건들거리는 게 아닌가. 마당가에는 수돗물이 있고, 고무 다라에 물을 받아 놓았는데, 맑은 물 위에도 모과꽃잎이 떠다녔다. 이것이야말로 자연이 짜는 화문석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어느 시인이 이런 먹잇감을 놓치랴.
가는귀가 먹어 여러 번 말해야 알아들으시는 기호 어머니는 도시로 간 자식들이 내려오면 싸주거나 자식들을 만나러 도시에 갈 때 싸 가지고 갈 것이 분명한 여러 가지 과실주와 차를 만들어 놓았는데, 그 중에 쑥차를 내오셨다. 차를 얻어 마시는데 마음 역시 화문석이 아니겠는가? 더하여 오래된 굴참나무가 있는 당산에서는 딱따구리가 나무를 파고 앞산 상수리나무 숲에서는 꾀꼬리가 울고 있었다.
이 시집을 내고서 성남 봉국사 효림 스님에게 연락을 드렸더니, 축하하는 밥을 살 테니 당장 성남으로 내려오라고 하셨다. 문단에서 인연이 된 서울과 분당, 용인의 몇몇 문인에게 연락을 하고 전철로 경원대역까지 갔다. 역에 차를 가지고 나오신 스님은 내가 차에 올라타자마자 백자 접시를 한 점을 내미셨다. 시집 발간 기념으로 주시는 거란다.
접시 바닥에 ‘幽玄’(유현)이라는 글이 파란색으로 쓰여 있었다. 유현이라. 내가 무슨 뜻인지 헤아리고 있는데, 스님은 요즘 도자기를 심심풀이로 시작했다고 하셨다. 나는 뜻이 확실히 잡히지 않는 ‘유현’을 헤어질 때쯤에야 물었다. 그러자 스님은 ‘공광규의 시가 유현하다’고 하셨다. 선방의 스님들처럼 설명을 하지 않고 시집을 실물로 들어 보이신 것이다.
시란 이런 것이 아니겠는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는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물을 들어 보이는 것이다. 나는 집에 돌아오면서 내 시가 과연 유현한가 하고 깊이 생각하였다. ‘幽’는 미묘하고, 심원하고, 깊고 조용하다는 뜻이다. ‘玄’은 오묘하고 미묘하며 고요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유현은 도리가 깊어서 알기 어려운 것을 뜻하기도 하고 이치나 아치가 썩 깊은 것을 뜻하기도 한다.
그러니 시가 유현하다는 것은, 시의 의미가 깊고 표현이 그윽하다는 말이겠다. 그럼 내 시가 과연 그런가? 독자들이 대답할 차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