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인상. 추천,당선작
[스크랩] 2009 <시인시각> 신인상 당선작 _ 주영헌, 김호기, 김미량
시치
2009. 7. 6. 01:17
시인시각 제3회 신인상 당선작 _ 주영헌, 김호기, 김미량
졸음, 夏葉, 음표 (외 4편)
주영헌
축 처진 나무의 이파리들이 그늘의자에 걸쳐 있다.
葉綠은 하얀 생각들로 가득했고 허공은 중심으로 빙그르 돌기 시작했다.
바닥으로 흘러내리려고만 하는 잎의 무게.
잎의 방향은 화살표처럼 언젠가 떨어질 곳을 가늠하고 있고, 의자는 빈 시소처럼 익숙한 바람의 줄기에 걸려 있다.
걸터앉아있기 좋은 시간
잠시 눈을 감아도 좋아
그러나 아주 잠시, 아직 잠들 때가 아니니까.
떨어뜨리려고 해도 찐득하게 달라붙어 있는 머릿속.
빈 둥지를 닮은 두통처럼
葉生이라는 것에 조금 더 달라 붙어있어야지.
쉴 새 없이 흔들리는 음표들.
오선지를 가득 채워가는 낮고 높은 음들
삐거덕거리는 반음과 쉼표로 한 악장의 시간을 넘기는 소리들
눈꺼풀이 시간을 닫으려고만 하는 오후
한참을 눈을 감고 있다 떴다
빈 사무실은 소리 없이 햇볕의 줄기를 향해 자라고 있고
창틀 사이로 여름 황사가
의자 하나를 차지하고 있다.
기울어진 큰바늘 시침이 낮은음자리 음표를 꺼내어 어디론가 알 수 없는 이명을 수신하고 있다.
音들이 꽉 들어차면 와르르 분해될 節氣들.
허공에 막 걸쳐있는 잎의 음표를 바람이 獨奏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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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빌라
빌라 한 채가 호수 한가운데로 이사를 왔다.
멘 처음 길은 불화에서 소통으로 가려고 했던 것 같다
떠들썩한 집들이가 끝나고
새로 생긴 빌라엔 올해만도 몇 사람이 입주를 했다
꽁꽁 닫힌 한여름 창문 속에서도 외출도 하지 않는 사람들
손잡이가 없는 현관, 흐릿 번져가는 입구
누구도 지나 온 시절이 번지지 않은 사람은 없다
똑똑 두드리는 소리를 먹어치우는 집
그 집 앞으로 이어지는 길은
이어졌다 끊기기를 반복한다.
물고기도 사람도 구름도 같이 뛰어 노는 길
버드나무가 긴 잎사귀로 빌라 주위를 비질하고 있다.
고요가 품고 있는 집들
점심나절 한바탕 소나기가 지나간 후
끊겼던 길이 다시 연결됐다.
수면 속에 숨어있던 창문들이 하나둘 떠오른다.
여름 장마가 묻어 있는 유리창을 닦아내고
오래된 얼굴 하나가 창문을 연다.
햇볕을 쬐지 못해 핏기 없는 얼굴, 나뭇잎 한 장이 떨어진다
잠시 멍한 얼굴에 주름이 생기고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에 닫혀 버리는 창문
바람의 무늬 밑으로 숨어버리는 얼굴.
아무런 공력 없이 만들어진 이 건물은 작은 바람에도 구겨진다
잎들이 둥둥 떠 있는 계절에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을
이 집에는 무게가 없는 사람들이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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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田
지난겨울 추위에 새싹을 뻿긴
빈 콩 쭉정이만 춘삼월을 조문하는 묵전
한여름 푸른 그늘을 키웠을 담배 대공이 드문드문 폐가 기둥처럼 남아 있다.
오래전 이곳에도 집이 있었다고 한다.
학업을 꺾고 도시로 나간 누이들의 귀향을 마중하러
신작로까지 한걸음에 달음질치던
담배 순만큼 푸른 아이들이 살던 그때
아이들만큼 젊었던 밭은 한 계절도 쉬어 가지 않았다.
연초건조장이 이쯤에 있었고
담배 잎 푸른 연기가 자욱하던
아이들의 나이가 무거워지는 만큼 농자금도 무거워져
점점 굽어가는 등, 김씨는
신작로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했다.
이사 가서도 처음은 밭을 놀리지 않았다고 한다.
계절마다 곡식을 심다
겨울을 먼저 쉬고 가을도 쉬고
묵田 옆으로 묵村이 생겨났다.
반쯤 해동된 밭(田)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다.
한쪽에선 아직도 타닥거리며 타고 있는 불씨들
반쯤 타다만 담배 대궁에선 흰 연기가 피어오르고
그 뒤편 그늘이 잘 들지 않는 곳엔
또 다른 생을 막 살기 시작한, 김씨의
둥그런 집 하나가 지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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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음의 지점
이쯤의 지점은 졸음이 유일한 소일이다
레일을 달리는 기차소리가 한적한 숨소리 같다
잠든 몸을 달리는 숨소리
이 공중의 객차는 지금 어느 곳으로 유영하고 있을까
틈틈이 잠의 문을 여는 生時
덜컹거리는 어느 꿈의 차창에 정차한 불면의 빛들
허공으로 달리는 잠의 좌석이 불편하다
간혹 까무룩 빠져드는 잠의 생애를 알리는 안내방송이
과속방지턱처럼 튀어나온다.
정차가 없는 生
정면으로 흘러가는 후경을 묵묵히 바라보며
저 낯선 풍경의 깊숙한 곳으로 흘러가는 시간
음지의 비탈에 녹지 않은 몇 평의 흰 겨울들이 소금처럼 빛나고
흰 구름의 이불을 덮고 있는 창천
몇 개의 터널이 끊어놓은 채널의 정차들과
하품처럼 토해놓는 낯선 후경들
내 몸의 일정한 이 숨소리들은 지금 어디를 달려가고 있을까
다만 짧은 순간을 향해
긴 시간을 달려가는 두근두근 진동
아무리 몸을 구기며 고쳐 앉아도 불편하기만 한
난청의 지점들이 몸을 흐르고 있을 뿐이다
누군가 남겨 놓고 간 잔여분의 잠
잠들지 않는 좌석에서 흘러 나왔을 불편한 자세의 生들
구름을 끌어올려 잠을 덮고 참았을,
수천의 갈래를 돌아 소리의 집으로 모여드는 길
풍경을 바꾸고 싶지만
이미 앞자리는 내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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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자
庵子는 몇 년째 구불한 길을 키우고 있다
물을 길어 올리기 힘든 배롱나무는
맨몸으로 절기를 구부려 수액을 마중하고 있다
사람의 나이를 지난 노승은 며칠째 생각을 끊고 있는 중이다
문을 열어주지 않는 쓸쓸한 풍경의 고리
물을 다 비운 늦가을 雨氣가 한가하다
지금쯤에는 부처도 穀氣를 끊고 있겠다
생각을 버린 노승은
등신불의 거푸집을 만드느라 고요만 채우고 있는데
어느 목구멍을 넘어 온 새의 소리가
고요를 쪼아 터트리고 있다
모든 허공은 나무들의 거푸집이겠다.
나무의 가장 격렬한 움직임이 정지이듯
五行을 다 버린 허공이 할 일이란 나무의 허영을 재는 일이다
비스듬히 누운 탑의 그림자를 몇 차례 밟아도
점점 더 풀어질 뿐인 오후
人內無人이 왕래했을 짧은 길에는 門의 무늬만 가득하다
이생을 다녀가는 물이 너무 무겁다
흔들리며 가볍게 비워가는 나뭇가지들
뒤집어진 한 해가 천천히 말라간다.
▲ 주영헌 : 1973년 충북 보은 출생. 경운서당, 명지대문화예술대학원 문창과 수학 중. 명지대학교 회계팀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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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세계의 나무들 (외 4편)
김호기
1-乾期의 나무들
건풍에 허공이 말라가는 시간이 있는 곳
빠르지 못해 오래 도망가는 거북이, 등에 붙어있는 잎
어느 바람이 뒤집으면 오래 버둥거리는 각질의 잎
바람이 거느리고 있는 낯모르는 수족들과
딱딱하게 굳어진 쥐들이 떨어지는 나무의 외곽
화석처럼 이름 모를 짐승들의 뼈가 부서지는 곳 그곳,
계절이 없는 나무는 아무 곳에서나 서서 잠을 잔다
건기의 바람이 맨몸으로 흔들린다.
맨몸의 바람이 숨어들면서 숲은 달아나 버렸다
달아나지 못한 눅눅한 바람은 움트지 않았다
건기의 땅에는 한 번쯤 바람을 타고 배가 지나간 자리의 흔적이 있다
2-雨期의 나무들
원주민의 알싸한 요통이 강물에 비린내를 푼다.
나무들이 버린 폭우.
편지를 쓰던 펜촉의 허리가 열대우림의 우기를 머금은 듯 휘어져 있고
토착어들은 죄다 구부러져 있다.
물총새가 토템폴에 물고기를 내리칠 때. 푸른색의 활자들에서는 나무가 자라난다. 새의 토템을 깎을 땐 반드시 이름이 없는 나무여야 새가 날아가지 않는다. 카누가 지나가는 강가에는 걸어 다니는 나무들로 분주하고 길은 점점 더 깊은 숲 속으로 밀려났다. 인간을 숭배하는 나무들의 가지마다에는 살아있는 쥐들의 울음소리가 시끄럽다.
3-구름나무
오래전 푸른 지능은 모두 구름이 되었다
내려다보는 연체의 종족은 어느 밤, 죽은 나무 위에 살며시 내려앉는다고 한다.
오랜 역설의 시간을 올라 구름이 되고 싶은 푸른 엽록의 지능
반짝이는 수많은 걸음을 허공으로 다 날려 보내고
대신, 구름의 흰 잎을 얻는다고 한다
그때부터 나무들의 후생에는 흰 연기가 피어오른다고 한다.
허공에도 傳說이 있다면 모두 나무가 키운 것들이다
다만 바람은 시든 두 겹의 눈꺼풀을 똑, 따서는 후 하고 불어버릴 뿐이었다.
-색맹을 깨닫는 순간 색맹이 아닌 것들에게 새로운 종의 색깔들이 생겨난다.
모든 첫 번째 풍경은 어둠에서 생겨나기 시작했다.
색을 구분해야 한다는 것은 장애를 앓고 있는 것이다
자화상은 나를 바라볼 수 없으며 색맹에게는 색을 가르칠 수 없었다.
눈은 색깔이라는 지팡이를 짚고
더듬거리고 있는 중이다
바람이 그린 초상화는 언제나 색이 칠해지지 않았다
물이 되지 못한 것들이 사막으로 모여들고
나는 저 속에서 말을 곧잘 잃어버리고 돌아서며 주머니를 뒤지곤 했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들을 거느리고 있고
미지라는 말은 언제나 간지럽다
눈을 감을 때마다 풍경들은 기이하게 일그러져 쉬고 있는 중이다.
불안은 숨어서 빛을 훔쳐본다는 것이며, 별의 진실은 먼지라는 것이다
풍경의 밑그림은 먼지이며
풍경을 지우는 것 또한 먼지라는 것이다
처음 기다림을 가르쳤던 그곳은 먼지만 가득했다
먼지 책 몇 페이지쯤에는 누군가 후 하고 불었던 흔적이 있고
바다는 노인을 품은 채 하늘과 서로 쓰다듬고 있다
우리는 모두 표준형 우울을 앓고 있을 뿐이다
풍경을 채우고 있는 것들.
당신은 또 누구죠 풍경이 내게 물어왔다
낡은 시간들이 녹슬어 흘러내리는 풍경
모든 소실점들이 소실되어가는 중이라고 했다
우리는 그곳에서 멸종에 이른 풍경들을 간간히 들썩이게 하는 바람을 격려할 뿐
아무도 색을 따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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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침대
스스로 자라고 스스로 소멸하는 구름의 뼈
너무 큰 옷을 입고 있지는 않나
그런 구름을 보며 사람들은 꼭 무언가를,
혹은 누군가를 닮았다고 말한다.
가끔은 길가 웅덩이가 구름과 닮아 있기도 했다.
내려다보는 즉시 가장 먼 곳의 존재를 흉내 내는 구름
혹은, 너무 일찍 날아오른 어린 아이들이
편한 침대 같은 저곳에 누워 무형의 무게를 재곤 한다
날 수 있다고 믿는 아이들
저 구름을 만질 수 있다고 믿었다.
아이들의 입에선 항상 구름이
몽글몽글하게 풀어져 나왔다.
구름이 금방 거대한 침대로 변하고,
하늘에서 양치는 아이가 나타나서
늑대와 사이좋게 양떼구름을 몰고 사라졌다.
손에 잡을 수 없는 것들.
사람에게서 떠난 먼지들과
불에 타버린 하얀 재가 하늘로 날아가는 일이 저처럼 다양하다
혹은, 몇몇의 가벼운 영혼들이 사라지는 곳이기도 하고
늘 변하는 하늘의 구름은
지금은 여기 없는 누군가가
놀며 남긴 흔적들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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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에서 까마귀가 날아왔다
귓속에서 옥수수 씨앗을 꺼내들자
손바닥에서 씨앗이 자란다.
펼친 두 손들이 한 시대를 그렇게 걸었다
이미 멸종한 시간들이 태양을 향해
폐를 꺼내들고 점을 친다.
너 이것들을 훔쳐가지 마라
훔쳐 달아난 이들은 영원히 굶주렸다
사막으로 도망간 그들은 협곡 바위에 뼈마디가 모두 부서졌다. 오아시스 갈대에 사지가 잘려나가고 선인장에 여러 조각으로 찢겨나가더니 결국 뜨거운 모래 속으로 삼켜지고 말았다. 그렇게 태양은 이글거리고
가시 위에 던져진 라마들이 아직 살아있고
바람이 죽음을 파먹으려 허공을 맴돌았다
벌어진 가슴으로 벌레가 기어들어가는
그 앞에, 손바닥의 옥수수를 바치던 시간
피 묻은 갈대를 걸어둔 대문마다
곧 춤을 춰야 할 출생의 울음들이
이미 한 시대를 걸어오고, 걸어가 버린다.
순례자들은 태양을 향해 춤을 추었다
라마는 바람의 울음으로 무리를 짓는다.
여전히 태양은 이글거리고
자꾸만 까마귀가 날아오는
날아오르는
바람은 무리를 짓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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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 중독자
겨울의 창문은 책을 읽을 때마다 입김을 만들어낸다.
바람이 활자 위로 창밖을 자꾸만 두드리고 싶어지는 밤
담배는 한 중독의 생을 태운다.
물에 젖은 백묵으로 적은 젖은 편지를 말리며 왼팔에 한 땀씩 바람을 새긴다.
녹아내리는 바람들을 휴지로 지그시 누를 때마다 눈물이 흘렀다
이 활자들을 다시는 쓰지 않으려고
주소를 먹어버렸다.
버려진 블랙홀의 한쪽으로 내 울음을 막았다.
서서히, 중독되는 것들이란 그런 것이다
다른 한 생에 대항하기 위한 한 알의 방법을 삼킨다
귓가에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마치 난청 같은 기억들이다
살아있음으로 죽음이 가득하다
잔혹한 거짓은 없다
교회 종탑이 오래된 건물을 흔들며 신들을 부른다
순간을 조용히 기다렸을 시간들이 이곳까지 울려 퍼진다
넌 저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 했다
냄새도 맡지 못했고 너는 내 경계만을 찢어놓고 멀리 도망가 버렸다
길을 잃은 바람은 슬픔으로 전염된다.
▲ 김호기 : 1989년 경기도 출생. 현재 경운서당 수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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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피나라 일기예보 (외 4편)
김미량
먼저 구름 모습 보시겠습니다
지루성피부구름 여전히 북상 중입니다
오랜 염증으로 허리 잘린 나무들이 누워있는 곳
두피나무가 푸석푸석한 머리 흔들면 한 차례 싸락눈 내립니다
쎄라스톤 연고로도 녹지 않는 끈질긴 집착이 덤으로 내립니다
외출 시엔 우산을 준비하세요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눈들이 위험하게 쌓여 눈사태도 발효 중이니
눈 다발지역은 잠시 대피를 바랍니다
상처가 눈덩이처럼 불어난
두피 아랫마을은 심각한 상황입니다
손가락이라 불리는 건달 다섯 명이 몰려다니며
제집인 양 집집마다 빨간딱지 붙이고 다닙니다
가려움 심해지는 봄이 오기 전에 그들을 수배 중입니다
오후 3시 헬기를 투입해 두피지방 스케일링 실시합니다
폭풍 같은 한 시간 얌전히 견뎌내시길 바랍니다
바람이 두피지방을 지나가는 시간은 3시 40분
박하사탕을 빨던 바람의 혓바닥 두피를 핥고 지날 때
아으 알싸한 쾌감에 두 눈 감으셔도 좋습니다
앞으로 미스터 브러시군 두피지역 단독 방문합니다
부드러운 손길에 찰랑찰랑 가로수 흔들리면
웃음소리 마을을 술렁이다 잠이 들 것으로 보입니다
두피 전 지역으로 오후에 적은 양의 비 소식 있습니다
우울했던 마음 마른 타월로 뽀송뽀송 달래주시고
외출 시 검은 재킷의 유혹만 뿌리치시기 바랍니다
우산은 접고 사소한 고민 주저 없이 들고 나가
톡톡 털어 버리시길 당부 드립니다
이상, 날씨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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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몽 한 근 끊어가세요
하얀 셔츠로 낯을 가리고
큐빅 핀으로 마음 빗장을 채운 밤,
도마 위에서 숭숭 잘려나가는
우울한 기억 한 점,
좌충우돌 바늘을 세우는
당신의 혓바닥 한 점,
나날이 늘어가는 바람의 이간질 한 점,
돌돌 말아
적당히 흘린 눈물에 효력 잃은 부적을 넣으면
소스 맛은 마음먹기 달라서 새콤한 후회도
달디단 희망으로 미각을 조종합니다
잇몸은 더 이상 이빨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으므로 꼭꼭 리듬을 씹으며 레일을
통과해야 합니다 당신도 맛보세요 이, 기가 막힌 안성맞춤 감정조절
후식으로 주문을 외워 비를 부릅니다
저 구질구질한 비는 예쁜 심장이 탐나는지
비의 몸에 빨대를 꽂기도 전에 내 몸을 덮쳐요
썩으려는 몸은 처방받은 방부제가 지탱해줘요
심장은 언제나 볼륨을 높이고, 혈압을 간섭하려들어요
저울조차 거부해 값을 매길 수 없는 나는
중년으로 분리된 근수 미달
이제 그만 어둔 터널에서 나를 뱉어버려요
맑은 피 수혈 받으러 동굴 밖으로 걸어 나갈 시간
누가 이 안대 좀 벗겨줄 수 없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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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구합니다
전봇대에 나열된 집의 문패를 읽는다
오를 대로 오른 집의 몸을 잡고 까치발 딛고서면
거기, 높은 혈압 외부로 노출한
집주인 연락처 당당하게 걸려 있다
호주머니 속으로 낱장의 주인 떼어내 구겨 넣는다
전세 행 왕복으로 예매해둔 설움
꼬깃꼬깃 접어 둔 주머니 속 몇 번씩 안전을 확인한다
노란색 위험금지 구역에 불법으로 세운 집
원룸 투룸 쓰리룸 켜켜이 떡시루 닮았다
아랫목을 뜨겁게 달구고 지나가는 사람을 부르며
바람 앞에도 물러서지 않는 종이 집
어느 날 비라도 들이치면 원룸 하나 선뜻 내어주기도 하는,
저 집에 들어 집 한 채 찜하고 미친 척 살아보면 안 되나
미처 떼어내지 못한 창문 한 짝
팔랑팔랑 바람과 맞서는 위태로운 집
대출금 앞에 위태로운 게 어디 내 심장뿐인가
오르다 끝내는 하늘에 닿을
저 늘어난 집의 목에 깁스 채울 날 오리라
전봇대는 집 없는 자의 전용 자석 광고판
지붕도 없는 하얀 집이 입춘 지나도록 눈 맞고 있다
철컥철컥 내 눈이 먼저 붙어버리는
저기, 저 대기 중인 집 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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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불을 씹다
토막 난 개불이 꿈틀거린다
젓가락을 타고 오르다가
입에 닿는 순간 오므라들며 굳어간다
우리는 토막 난 바다에 둘러앉아 부지런히
고통을 덜어주는 의식을 치른다
초장을 듬뿍 찍어 개불의 비명을 지우고
엄지와 검지에 힘을 모아 젓가락으로 들어 올리면
매끄럽게 나를 통과하는 쫄깃한 주검의 맛
나도 한때 깊고 어두운 길을 통과해야 했다
정체 모를 점액질 흥건한 거리를 질척거리다
공연히 혓바닥을 깨물며
오랫동안 습기를 따라 돌아다녔다
태양 앞으로 불려가는
단 한 번의 기회도 얻지 못한 채
그늘 아래 축축한 몸을 말렸다
상처가 또 다른 상처를 향해 문을 연다
빈 접시에 누군가 나를 씹다가 뱉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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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말에 대한 예의
안녕 사장님
당신의 긴 혀를 날름 끊어먹고 사라진 꽃뱀의 아지트는 어디 있나요
당신이 던져 준 부러진 토막말 줍느라 두 손은 바닥에 붙었어요
캐비닛에 한 달째 보류 중인 자존심도 이제 그만 결제를 해줘요
아랫배가 부풀어 오르는 사장님
당신이 키우던 말들은 영양실조에 걸려 위험해요
도마뱀은 당신이 사랑하는 애완동물
무서워요 사장님
밤마다 잘라먹은 꼬리의 살점이 이빨에 끼었어요
입 좀 다물어 봐요
비린내가 폴폴 날아와
내 얼굴에 불시착한 불행한 금요일
퇴근길에 또 당신을 만났어요
엘리베이터 안,
뽕브라가 들통 난 게 분명해요
심장이 오그라들어도 당당한 나는 올드미스
문이 열리고 펑! 연기처럼 사라지려는 찰라
스커트 뒷자락을 시침질하듯 찔러대는
당신의 반말이 바늘귀에 딱 걸렸어요
오늘밤 꿈속으로 놀러오세요
수술대 위에 누운 당신은 나의 환자
윙크 한 방이면 전신마취쯤 문제 없어요
아직도 웃고 있는 당신,
걱정 말아요 지퍼는 안전하게 보호해줄게요
배를 가르면 기형의 누 떼 한 쌍 웅크리고 있고
엊그제 회식 때 먹은 흑염소 울음도 고였을 테지요
꽃뱀은 두 개의 혀를 달고 스르륵 자취를 감추네요
불쌍한 도마뱀 꼬리 조각조각 이어 붙여요
아, 이제 문을 닫아야 할 시간
푹 꺼진 뱃속에다 작년 가을 햇빛에 소독한
들국화를 켜켜이 뿌리고 봉합해요
마취가 풀리려는지 기침을 하시는 사장님
내일 아침 향기로운 존댓말이 입속에서
빠져나와도 너무 놀라지 말아요
사장님, 내 맘에 맞게 당신을 조립했어요
▲ 김미량 : 1970년 대전 출생. 〈젊은 시인들〉동인.
졸음, 夏葉, 음표 (외 4편)
주영헌
축 처진 나무의 이파리들이 그늘의자에 걸쳐 있다.
葉綠은 하얀 생각들로 가득했고 허공은 중심으로 빙그르 돌기 시작했다.
바닥으로 흘러내리려고만 하는 잎의 무게.
잎의 방향은 화살표처럼 언젠가 떨어질 곳을 가늠하고 있고, 의자는 빈 시소처럼 익숙한 바람의 줄기에 걸려 있다.
걸터앉아있기 좋은 시간
잠시 눈을 감아도 좋아
그러나 아주 잠시, 아직 잠들 때가 아니니까.
떨어뜨리려고 해도 찐득하게 달라붙어 있는 머릿속.
빈 둥지를 닮은 두통처럼
葉生이라는 것에 조금 더 달라 붙어있어야지.
쉴 새 없이 흔들리는 음표들.
오선지를 가득 채워가는 낮고 높은 음들
삐거덕거리는 반음과 쉼표로 한 악장의 시간을 넘기는 소리들
눈꺼풀이 시간을 닫으려고만 하는 오후
한참을 눈을 감고 있다 떴다
빈 사무실은 소리 없이 햇볕의 줄기를 향해 자라고 있고
창틀 사이로 여름 황사가
의자 하나를 차지하고 있다.
기울어진 큰바늘 시침이 낮은음자리 음표를 꺼내어 어디론가 알 수 없는 이명을 수신하고 있다.
音들이 꽉 들어차면 와르르 분해될 節氣들.
허공에 막 걸쳐있는 잎의 음표를 바람이 獨奏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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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빌라
빌라 한 채가 호수 한가운데로 이사를 왔다.
멘 처음 길은 불화에서 소통으로 가려고 했던 것 같다
떠들썩한 집들이가 끝나고
새로 생긴 빌라엔 올해만도 몇 사람이 입주를 했다
꽁꽁 닫힌 한여름 창문 속에서도 외출도 하지 않는 사람들
손잡이가 없는 현관, 흐릿 번져가는 입구
누구도 지나 온 시절이 번지지 않은 사람은 없다
똑똑 두드리는 소리를 먹어치우는 집
그 집 앞으로 이어지는 길은
이어졌다 끊기기를 반복한다.
물고기도 사람도 구름도 같이 뛰어 노는 길
버드나무가 긴 잎사귀로 빌라 주위를 비질하고 있다.
고요가 품고 있는 집들
점심나절 한바탕 소나기가 지나간 후
끊겼던 길이 다시 연결됐다.
수면 속에 숨어있던 창문들이 하나둘 떠오른다.
여름 장마가 묻어 있는 유리창을 닦아내고
오래된 얼굴 하나가 창문을 연다.
햇볕을 쬐지 못해 핏기 없는 얼굴, 나뭇잎 한 장이 떨어진다
잠시 멍한 얼굴에 주름이 생기고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에 닫혀 버리는 창문
바람의 무늬 밑으로 숨어버리는 얼굴.
아무런 공력 없이 만들어진 이 건물은 작은 바람에도 구겨진다
잎들이 둥둥 떠 있는 계절에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을
이 집에는 무게가 없는 사람들이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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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田
지난겨울 추위에 새싹을 뻿긴
빈 콩 쭉정이만 춘삼월을 조문하는 묵전
한여름 푸른 그늘을 키웠을 담배 대공이 드문드문 폐가 기둥처럼 남아 있다.
오래전 이곳에도 집이 있었다고 한다.
학업을 꺾고 도시로 나간 누이들의 귀향을 마중하러
신작로까지 한걸음에 달음질치던
담배 순만큼 푸른 아이들이 살던 그때
아이들만큼 젊었던 밭은 한 계절도 쉬어 가지 않았다.
연초건조장이 이쯤에 있었고
담배 잎 푸른 연기가 자욱하던
아이들의 나이가 무거워지는 만큼 농자금도 무거워져
점점 굽어가는 등, 김씨는
신작로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했다.
이사 가서도 처음은 밭을 놀리지 않았다고 한다.
계절마다 곡식을 심다
겨울을 먼저 쉬고 가을도 쉬고
묵田 옆으로 묵村이 생겨났다.
반쯤 해동된 밭(田)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다.
한쪽에선 아직도 타닥거리며 타고 있는 불씨들
반쯤 타다만 담배 대궁에선 흰 연기가 피어오르고
그 뒤편 그늘이 잘 들지 않는 곳엔
또 다른 생을 막 살기 시작한, 김씨의
둥그런 집 하나가 지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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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음의 지점
이쯤의 지점은 졸음이 유일한 소일이다
레일을 달리는 기차소리가 한적한 숨소리 같다
잠든 몸을 달리는 숨소리
이 공중의 객차는 지금 어느 곳으로 유영하고 있을까
틈틈이 잠의 문을 여는 生時
덜컹거리는 어느 꿈의 차창에 정차한 불면의 빛들
허공으로 달리는 잠의 좌석이 불편하다
간혹 까무룩 빠져드는 잠의 생애를 알리는 안내방송이
과속방지턱처럼 튀어나온다.
정차가 없는 生
정면으로 흘러가는 후경을 묵묵히 바라보며
저 낯선 풍경의 깊숙한 곳으로 흘러가는 시간
음지의 비탈에 녹지 않은 몇 평의 흰 겨울들이 소금처럼 빛나고
흰 구름의 이불을 덮고 있는 창천
몇 개의 터널이 끊어놓은 채널의 정차들과
하품처럼 토해놓는 낯선 후경들
내 몸의 일정한 이 숨소리들은 지금 어디를 달려가고 있을까
다만 짧은 순간을 향해
긴 시간을 달려가는 두근두근 진동
아무리 몸을 구기며 고쳐 앉아도 불편하기만 한
난청의 지점들이 몸을 흐르고 있을 뿐이다
누군가 남겨 놓고 간 잔여분의 잠
잠들지 않는 좌석에서 흘러 나왔을 불편한 자세의 生들
구름을 끌어올려 잠을 덮고 참았을,
수천의 갈래를 돌아 소리의 집으로 모여드는 길
풍경을 바꾸고 싶지만
이미 앞자리는 내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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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자
庵子는 몇 년째 구불한 길을 키우고 있다
물을 길어 올리기 힘든 배롱나무는
맨몸으로 절기를 구부려 수액을 마중하고 있다
사람의 나이를 지난 노승은 며칠째 생각을 끊고 있는 중이다
문을 열어주지 않는 쓸쓸한 풍경의 고리
물을 다 비운 늦가을 雨氣가 한가하다
지금쯤에는 부처도 穀氣를 끊고 있겠다
생각을 버린 노승은
등신불의 거푸집을 만드느라 고요만 채우고 있는데
어느 목구멍을 넘어 온 새의 소리가
고요를 쪼아 터트리고 있다
모든 허공은 나무들의 거푸집이겠다.
나무의 가장 격렬한 움직임이 정지이듯
五行을 다 버린 허공이 할 일이란 나무의 허영을 재는 일이다
비스듬히 누운 탑의 그림자를 몇 차례 밟아도
점점 더 풀어질 뿐인 오후
人內無人이 왕래했을 짧은 길에는 門의 무늬만 가득하다
이생을 다녀가는 물이 너무 무겁다
흔들리며 가볍게 비워가는 나뭇가지들
뒤집어진 한 해가 천천히 말라간다.
▲ 주영헌 : 1973년 충북 보은 출생. 경운서당, 명지대문화예술대학원 문창과 수학 중. 명지대학교 회계팀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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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세계의 나무들 (외 4편)
김호기
1-乾期의 나무들
건풍에 허공이 말라가는 시간이 있는 곳
빠르지 못해 오래 도망가는 거북이, 등에 붙어있는 잎
어느 바람이 뒤집으면 오래 버둥거리는 각질의 잎
바람이 거느리고 있는 낯모르는 수족들과
딱딱하게 굳어진 쥐들이 떨어지는 나무의 외곽
화석처럼 이름 모를 짐승들의 뼈가 부서지는 곳 그곳,
계절이 없는 나무는 아무 곳에서나 서서 잠을 잔다
건기의 바람이 맨몸으로 흔들린다.
맨몸의 바람이 숨어들면서 숲은 달아나 버렸다
달아나지 못한 눅눅한 바람은 움트지 않았다
건기의 땅에는 한 번쯤 바람을 타고 배가 지나간 자리의 흔적이 있다
2-雨期의 나무들
원주민의 알싸한 요통이 강물에 비린내를 푼다.
나무들이 버린 폭우.
편지를 쓰던 펜촉의 허리가 열대우림의 우기를 머금은 듯 휘어져 있고
토착어들은 죄다 구부러져 있다.
물총새가 토템폴에 물고기를 내리칠 때. 푸른색의 활자들에서는 나무가 자라난다. 새의 토템을 깎을 땐 반드시 이름이 없는 나무여야 새가 날아가지 않는다. 카누가 지나가는 강가에는 걸어 다니는 나무들로 분주하고 길은 점점 더 깊은 숲 속으로 밀려났다. 인간을 숭배하는 나무들의 가지마다에는 살아있는 쥐들의 울음소리가 시끄럽다.
3-구름나무
오래전 푸른 지능은 모두 구름이 되었다
내려다보는 연체의 종족은 어느 밤, 죽은 나무 위에 살며시 내려앉는다고 한다.
오랜 역설의 시간을 올라 구름이 되고 싶은 푸른 엽록의 지능
반짝이는 수많은 걸음을 허공으로 다 날려 보내고
대신, 구름의 흰 잎을 얻는다고 한다
그때부터 나무들의 후생에는 흰 연기가 피어오른다고 한다.
허공에도 傳說이 있다면 모두 나무가 키운 것들이다
다만 바람은 시든 두 겹의 눈꺼풀을 똑, 따서는 후 하고 불어버릴 뿐이었다.
-색맹을 깨닫는 순간 색맹이 아닌 것들에게 새로운 종의 색깔들이 생겨난다.
모든 첫 번째 풍경은 어둠에서 생겨나기 시작했다.
색을 구분해야 한다는 것은 장애를 앓고 있는 것이다
자화상은 나를 바라볼 수 없으며 색맹에게는 색을 가르칠 수 없었다.
눈은 색깔이라는 지팡이를 짚고
더듬거리고 있는 중이다
바람이 그린 초상화는 언제나 색이 칠해지지 않았다
물이 되지 못한 것들이 사막으로 모여들고
나는 저 속에서 말을 곧잘 잃어버리고 돌아서며 주머니를 뒤지곤 했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들을 거느리고 있고
미지라는 말은 언제나 간지럽다
눈을 감을 때마다 풍경들은 기이하게 일그러져 쉬고 있는 중이다.
불안은 숨어서 빛을 훔쳐본다는 것이며, 별의 진실은 먼지라는 것이다
풍경의 밑그림은 먼지이며
풍경을 지우는 것 또한 먼지라는 것이다
처음 기다림을 가르쳤던 그곳은 먼지만 가득했다
먼지 책 몇 페이지쯤에는 누군가 후 하고 불었던 흔적이 있고
바다는 노인을 품은 채 하늘과 서로 쓰다듬고 있다
우리는 모두 표준형 우울을 앓고 있을 뿐이다
풍경을 채우고 있는 것들.
당신은 또 누구죠 풍경이 내게 물어왔다
낡은 시간들이 녹슬어 흘러내리는 풍경
모든 소실점들이 소실되어가는 중이라고 했다
우리는 그곳에서 멸종에 이른 풍경들을 간간히 들썩이게 하는 바람을 격려할 뿐
아무도 색을 따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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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침대
스스로 자라고 스스로 소멸하는 구름의 뼈
너무 큰 옷을 입고 있지는 않나
그런 구름을 보며 사람들은 꼭 무언가를,
혹은 누군가를 닮았다고 말한다.
가끔은 길가 웅덩이가 구름과 닮아 있기도 했다.
내려다보는 즉시 가장 먼 곳의 존재를 흉내 내는 구름
혹은, 너무 일찍 날아오른 어린 아이들이
편한 침대 같은 저곳에 누워 무형의 무게를 재곤 한다
날 수 있다고 믿는 아이들
저 구름을 만질 수 있다고 믿었다.
아이들의 입에선 항상 구름이
몽글몽글하게 풀어져 나왔다.
구름이 금방 거대한 침대로 변하고,
하늘에서 양치는 아이가 나타나서
늑대와 사이좋게 양떼구름을 몰고 사라졌다.
손에 잡을 수 없는 것들.
사람에게서 떠난 먼지들과
불에 타버린 하얀 재가 하늘로 날아가는 일이 저처럼 다양하다
혹은, 몇몇의 가벼운 영혼들이 사라지는 곳이기도 하고
늘 변하는 하늘의 구름은
지금은 여기 없는 누군가가
놀며 남긴 흔적들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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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에서 까마귀가 날아왔다
귓속에서 옥수수 씨앗을 꺼내들자
손바닥에서 씨앗이 자란다.
펼친 두 손들이 한 시대를 그렇게 걸었다
이미 멸종한 시간들이 태양을 향해
폐를 꺼내들고 점을 친다.
너 이것들을 훔쳐가지 마라
훔쳐 달아난 이들은 영원히 굶주렸다
사막으로 도망간 그들은 협곡 바위에 뼈마디가 모두 부서졌다. 오아시스 갈대에 사지가 잘려나가고 선인장에 여러 조각으로 찢겨나가더니 결국 뜨거운 모래 속으로 삼켜지고 말았다. 그렇게 태양은 이글거리고
가시 위에 던져진 라마들이 아직 살아있고
바람이 죽음을 파먹으려 허공을 맴돌았다
벌어진 가슴으로 벌레가 기어들어가는
그 앞에, 손바닥의 옥수수를 바치던 시간
피 묻은 갈대를 걸어둔 대문마다
곧 춤을 춰야 할 출생의 울음들이
이미 한 시대를 걸어오고, 걸어가 버린다.
순례자들은 태양을 향해 춤을 추었다
라마는 바람의 울음으로 무리를 짓는다.
여전히 태양은 이글거리고
자꾸만 까마귀가 날아오는
날아오르는
바람은 무리를 짓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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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 중독자
겨울의 창문은 책을 읽을 때마다 입김을 만들어낸다.
바람이 활자 위로 창밖을 자꾸만 두드리고 싶어지는 밤
담배는 한 중독의 생을 태운다.
물에 젖은 백묵으로 적은 젖은 편지를 말리며 왼팔에 한 땀씩 바람을 새긴다.
녹아내리는 바람들을 휴지로 지그시 누를 때마다 눈물이 흘렀다
이 활자들을 다시는 쓰지 않으려고
주소를 먹어버렸다.
버려진 블랙홀의 한쪽으로 내 울음을 막았다.
서서히, 중독되는 것들이란 그런 것이다
다른 한 생에 대항하기 위한 한 알의 방법을 삼킨다
귓가에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마치 난청 같은 기억들이다
살아있음으로 죽음이 가득하다
잔혹한 거짓은 없다
교회 종탑이 오래된 건물을 흔들며 신들을 부른다
순간을 조용히 기다렸을 시간들이 이곳까지 울려 퍼진다
넌 저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 했다
냄새도 맡지 못했고 너는 내 경계만을 찢어놓고 멀리 도망가 버렸다
길을 잃은 바람은 슬픔으로 전염된다.
▲ 김호기 : 1989년 경기도 출생. 현재 경운서당 수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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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피나라 일기예보 (외 4편)
김미량
먼저 구름 모습 보시겠습니다
지루성피부구름 여전히 북상 중입니다
오랜 염증으로 허리 잘린 나무들이 누워있는 곳
두피나무가 푸석푸석한 머리 흔들면 한 차례 싸락눈 내립니다
쎄라스톤 연고로도 녹지 않는 끈질긴 집착이 덤으로 내립니다
외출 시엔 우산을 준비하세요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눈들이 위험하게 쌓여 눈사태도 발효 중이니
눈 다발지역은 잠시 대피를 바랍니다
상처가 눈덩이처럼 불어난
두피 아랫마을은 심각한 상황입니다
손가락이라 불리는 건달 다섯 명이 몰려다니며
제집인 양 집집마다 빨간딱지 붙이고 다닙니다
가려움 심해지는 봄이 오기 전에 그들을 수배 중입니다
오후 3시 헬기를 투입해 두피지방 스케일링 실시합니다
폭풍 같은 한 시간 얌전히 견뎌내시길 바랍니다
바람이 두피지방을 지나가는 시간은 3시 40분
박하사탕을 빨던 바람의 혓바닥 두피를 핥고 지날 때
아으 알싸한 쾌감에 두 눈 감으셔도 좋습니다
앞으로 미스터 브러시군 두피지역 단독 방문합니다
부드러운 손길에 찰랑찰랑 가로수 흔들리면
웃음소리 마을을 술렁이다 잠이 들 것으로 보입니다
두피 전 지역으로 오후에 적은 양의 비 소식 있습니다
우울했던 마음 마른 타월로 뽀송뽀송 달래주시고
외출 시 검은 재킷의 유혹만 뿌리치시기 바랍니다
우산은 접고 사소한 고민 주저 없이 들고 나가
톡톡 털어 버리시길 당부 드립니다
이상, 날씨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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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몽 한 근 끊어가세요
하얀 셔츠로 낯을 가리고
큐빅 핀으로 마음 빗장을 채운 밤,
도마 위에서 숭숭 잘려나가는
우울한 기억 한 점,
좌충우돌 바늘을 세우는
당신의 혓바닥 한 점,
나날이 늘어가는 바람의 이간질 한 점,
돌돌 말아
적당히 흘린 눈물에 효력 잃은 부적을 넣으면
소스 맛은 마음먹기 달라서 새콤한 후회도
달디단 희망으로 미각을 조종합니다
잇몸은 더 이상 이빨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으므로 꼭꼭 리듬을 씹으며 레일을
통과해야 합니다 당신도 맛보세요 이, 기가 막힌 안성맞춤 감정조절
후식으로 주문을 외워 비를 부릅니다
저 구질구질한 비는 예쁜 심장이 탐나는지
비의 몸에 빨대를 꽂기도 전에 내 몸을 덮쳐요
썩으려는 몸은 처방받은 방부제가 지탱해줘요
심장은 언제나 볼륨을 높이고, 혈압을 간섭하려들어요
저울조차 거부해 값을 매길 수 없는 나는
중년으로 분리된 근수 미달
이제 그만 어둔 터널에서 나를 뱉어버려요
맑은 피 수혈 받으러 동굴 밖으로 걸어 나갈 시간
누가 이 안대 좀 벗겨줄 수 없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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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구합니다
전봇대에 나열된 집의 문패를 읽는다
오를 대로 오른 집의 몸을 잡고 까치발 딛고서면
거기, 높은 혈압 외부로 노출한
집주인 연락처 당당하게 걸려 있다
호주머니 속으로 낱장의 주인 떼어내 구겨 넣는다
전세 행 왕복으로 예매해둔 설움
꼬깃꼬깃 접어 둔 주머니 속 몇 번씩 안전을 확인한다
노란색 위험금지 구역에 불법으로 세운 집
원룸 투룸 쓰리룸 켜켜이 떡시루 닮았다
아랫목을 뜨겁게 달구고 지나가는 사람을 부르며
바람 앞에도 물러서지 않는 종이 집
어느 날 비라도 들이치면 원룸 하나 선뜻 내어주기도 하는,
저 집에 들어 집 한 채 찜하고 미친 척 살아보면 안 되나
미처 떼어내지 못한 창문 한 짝
팔랑팔랑 바람과 맞서는 위태로운 집
대출금 앞에 위태로운 게 어디 내 심장뿐인가
오르다 끝내는 하늘에 닿을
저 늘어난 집의 목에 깁스 채울 날 오리라
전봇대는 집 없는 자의 전용 자석 광고판
지붕도 없는 하얀 집이 입춘 지나도록 눈 맞고 있다
철컥철컥 내 눈이 먼저 붙어버리는
저기, 저 대기 중인 집 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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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불을 씹다
토막 난 개불이 꿈틀거린다
젓가락을 타고 오르다가
입에 닿는 순간 오므라들며 굳어간다
우리는 토막 난 바다에 둘러앉아 부지런히
고통을 덜어주는 의식을 치른다
초장을 듬뿍 찍어 개불의 비명을 지우고
엄지와 검지에 힘을 모아 젓가락으로 들어 올리면
매끄럽게 나를 통과하는 쫄깃한 주검의 맛
나도 한때 깊고 어두운 길을 통과해야 했다
정체 모를 점액질 흥건한 거리를 질척거리다
공연히 혓바닥을 깨물며
오랫동안 습기를 따라 돌아다녔다
태양 앞으로 불려가는
단 한 번의 기회도 얻지 못한 채
그늘 아래 축축한 몸을 말렸다
상처가 또 다른 상처를 향해 문을 연다
빈 접시에 누군가 나를 씹다가 뱉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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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말에 대한 예의
안녕 사장님
당신의 긴 혀를 날름 끊어먹고 사라진 꽃뱀의 아지트는 어디 있나요
당신이 던져 준 부러진 토막말 줍느라 두 손은 바닥에 붙었어요
캐비닛에 한 달째 보류 중인 자존심도 이제 그만 결제를 해줘요
아랫배가 부풀어 오르는 사장님
당신이 키우던 말들은 영양실조에 걸려 위험해요
도마뱀은 당신이 사랑하는 애완동물
무서워요 사장님
밤마다 잘라먹은 꼬리의 살점이 이빨에 끼었어요
입 좀 다물어 봐요
비린내가 폴폴 날아와
내 얼굴에 불시착한 불행한 금요일
퇴근길에 또 당신을 만났어요
엘리베이터 안,
뽕브라가 들통 난 게 분명해요
심장이 오그라들어도 당당한 나는 올드미스
문이 열리고 펑! 연기처럼 사라지려는 찰라
스커트 뒷자락을 시침질하듯 찔러대는
당신의 반말이 바늘귀에 딱 걸렸어요
오늘밤 꿈속으로 놀러오세요
수술대 위에 누운 당신은 나의 환자
윙크 한 방이면 전신마취쯤 문제 없어요
아직도 웃고 있는 당신,
걱정 말아요 지퍼는 안전하게 보호해줄게요
배를 가르면 기형의 누 떼 한 쌍 웅크리고 있고
엊그제 회식 때 먹은 흑염소 울음도 고였을 테지요
꽃뱀은 두 개의 혀를 달고 스르륵 자취를 감추네요
불쌍한 도마뱀 꼬리 조각조각 이어 붙여요
아, 이제 문을 닫아야 할 시간
푹 꺼진 뱃속에다 작년 가을 햇빛에 소독한
들국화를 켜켜이 뿌리고 봉합해요
마취가 풀리려는지 기침을 하시는 사장님
내일 아침 향기로운 존댓말이 입속에서
빠져나와도 너무 놀라지 말아요
사장님, 내 맘에 맞게 당신을 조립했어요
▲ 김미량 : 1970년 대전 출생. 〈젊은 시인들〉동인.
출처 : 푸른 시의 방
글쓴이 : 강인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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