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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당신은 누구인가? / 채호기

시치 2009. 6. 28. 22:05

 

 

 

 

 

 

             당신은 누구인가?

 

                                                       - 채호기 

 

 

 

 당신은 기다리는 사람,

 꽃을 실어오는 식물의 혈관 근처에서 서성이는,

 줄기로부터 새로 돋아나는 꽃대를

 밀고 올라오는 꽃의 화약에 불을 붙이는

 점화기, 당신은 꽃으로의 폭발을 격발하는 사람.

 

 당신의 책에는 또 다른 사랑의 약탈자로

 기록된 당신은 사랑을 표상하는 모든

 단어를 훔쳐 먹는 공포의 포식자.

 당신은 아름답다. 언어의 정자를 수정받아

 꽃을 잉태하는 관능적인 신부.

 글자가 당신의 자궁에 달라붙는 순간

 사랑의 단어는 잉태된다.

 꽃의 씨방은 당신에게는 책, 언어의 불알,

 사랑의 정자.

 

 꽃이 없는 책에서 당신은 꽃을 보고 만지고

 향기 맡고 애무하고, 마침내 언어와의

 격렬한 정사를 통해 사랑을 수태한다.

 

 사랑이 없는 들판에서, 사랑과 무관한 산에서,

 그저 바위일 뿐인 바위 곁에서, 냇물 옆에서,

 당신이 출산한, 당신이 격발한 꽃들은 피어난다.

 사랑의 단어에서, 사랑의 문장에서 사랑의

 표상으로, 사랑의 향기로, 사랑의 자태로,

 사랑의 색깔로 꽃들은 피어나 하늘거린다.

 

 아아, 그러나, 당신을 떠나버린 사랑이여!

 당신을 충만케 한 것도 잠시, 저 초원에서

 하늘거리는 사랑이여! 이렇게 환한 날에도

 당신의 고독한 눈동자는 맹인처럼 더듬거리며

 책을 찾네. 모든 페이지의 문장에서, 행간에서, 단어에서……

 사랑하는 그를 발굴하기 위해 당신은 책을 읽는다.

 

 당신은 기다리는 사람,

 그가 부재하는 당신의 책에서 사랑하는 그를

 약탈하는 사람. ‘사랑하는 그 사람’인 시행이

 당신의 부드럽고 창백한 목덜미에 박힐 때까지,

 당신의 책에서 사랑이란 단어의 입술이

 당신의 어여쁜 피를 빨아 황홀하여

 아득해질 때까지, 당신은

 사랑하는 육체를 기다리는 사람.

 

 

           시집『손가락이 뜨겁다』2009 문지.

 

 

 

 

                    - 1957년 대구 출생. 대전대 국문과 졸업.

                       1988년『창작과비평』등단.

                      서울예대 문창과 교수. 문학과지성사 대표이사.

 

 

 

 

 

출처 : 폴래폴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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