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관련글

[스크랩] 시인 고은

시치 2009. 5. 18. 23:16

시인 고은(高銀.1933.8.1∼  )

 

 

  시인. 본명 은태(銀泰). 법명 일초(一超). 전북 군산시 미룡동(옥구) 생. 미룡초등학교 졸, 군산중학교 4년 휴학, 해인사 대교과(大敎科.1951년), 1951년부터 해인사 승려가 됨(1962년까지). 선 과정(禪課程.1957년) 이수, 1959년 대덕법계(大德法階) 품수(稟受). 1956년 [불교신문]을 창간, 초대 주필 역임. 1958년 「현대 문학」에 <봄밤의 말씀>, <눈길>, <천은사운(天恩寺韻)>, [현대시]지에 시 <폐결핵>(1958)이 추천되어 환속, 등단. 1960년 대본산 주지, [불교신문] 주필을 역임, 승려시인이었으나, 1962년 환속, 일정한 직업 없이 시작(詩作), 저술작업에 전념하였다.

   1974년 자유실천문인협회 창립, 초대 간사, 민족예술인총연합회 공동의장, 민족문학작가회 회장 등 역임. 1975년 제1회 한국문학작가상, 시집 *<만인보>(1989-1,2,3권)로 3회 만해문학상(1988년. [창작과 비평사] 운영), 1991년 중앙문화대상 예술상 수상. 美 하바드대 하바드옌칭 연구교수, 버클리대 객원교수 역임

  1970년대 지식인의 민주화운동에 적극 참여 여러 차례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발랄하고 청신하며 기발한 감성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다.

 

【신상 명세】

▶생년월일 : 1933. 8. 1(호적에는 4월 1일로 잘못 기재됨)

▶출생지 : 전북 옥구군 미면 미룡리(현, 군산시 미룡동 139)에서 부 고근식(高根植) 모 최점례(崔点禮)의 장남으로 태어남

▶본명 : 은태(銀泰). 6ㆍ25전쟁 중 끝자를 떼고 ‘은’이라고 지칭한 이래 오늘에 이른다. 아우 은철(銀喆)이 있음

▶주소 : 경기도 안성군 공도면 마정리 대림동산 장미골 173

▶가족 관계 : 83년 5월 결혼한 부인 이상화(李相華.중앙대 교수)와 딸 차령이 있다.

 

【학력】

   9세까지 이 마을 저 마을의 서당을 다니며 <동몽선습> <논어> 등을 익히다 1943년 미룡국교에 입학. 조선어 과목이 폐지되어 일본어만으로 수업했으나, 한글로 된 소설을 탐독. 3학년 때 장차 무엇이 되겠느냐는 교장 질문에 찬호항이 되겠다고 해 천황 모독죄로 3개월간 노역(勞役). 8ㆍ15해방으로 월반(越班). 새로 부임한 친일파 교장 축출을 위한 동맹휴학을 주도, 이 때문에 1년 뒤 신설된 군산사범학교 입학 시험에는 합격했으나 불합격 처분당함. 이듬해 군산중학에 수석으로 입학. 이때부터 공부가 싫어 미술부에 들어가 교내 전람회에서 1등함. 50년 4학년 때 6ㆍ25전쟁으로 휴학. 9월 수복 전후 동족 상잔의 참극으로 정신 착란 상태 지속, 가출이 빈번해짐. 학업 계속을 거부하여 가정 불화가 잦았다.

 

【승려 생활】

  1952년 승려가 됨. 법명은 일초(一超). 효봉(曉峰) 스님의 상좌로 10년간 선(禪)과 방랑으로 세월을 보냄. 본사(本寺)인 송공사(松廣寺). 목포 유달산 암굴의 거지대장의 수제자가 되어 구걸 행각에 한동안 몰입. 57년 서울선학원(禪學院)에 들어감. 불교 총무원 간부, 전등사 주지, 해인사 주지 대리 등 역임. 「불교 신문」 창간에 참여, 초대 주필로 논설, 시문을 발표. 61년 평승려로 돌아가 교단 혁신 운동을 위한 청년 승려 단합을 서두르다 종정 하야(下野) 음모로 오판되어 징계회의에 회부되기도 함. 62년 한국일보에 환속 선언을 발표하고 환속. 중생 제도에 대한 환상이 강해서 그 때문에 현실에서의 좌절이 몇 번 있었다.

 

【문단 경력】

  본명 고은태(高銀泰). 전북 군산 출생. 군산중학교 4학년까지가 공식적인 학력이다. 1952년 20세의 나이로 입산하여 승려가 되었다. 법명은 일초(一超)로 효봉선사의 상좌가 된 이래 10년간 참선과 방랑의 세월을 보내며 시를 써왔다. 조지훈 등의 천거로 1958년 [현대시]에 <폐결핵>을 발표하며 문단에 데뷔하였다. 1960년 첫 시집 <피안감성(彼岸感性)>을 간행하였고, 1962년 환속하여 시인으로, 어두운 독재시대에 맞서는 재야운동가로서의 험난한 길을 걷게 되었다. 1974년 시집 <문의 마을에 가서>를 출판하며 시인으로서 확고하게 자리매김하였다.

  그 해부터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민주회복국민회의, 민족문학작가회의 등에 참여하며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에 앞장서 왔다. 1983년 이상화(李相華)와 결혼하였고 20여 년간 지은 시들을 정리하여 <고은시전집>1ㆍ2권을 민음사에서 간행하였다. 1986년 [세계의 문학]에 <만인보(萬人譜)> 연재를 시작, 그 해 창작과 비평사에서 <만인보> 1ㆍ2ㆍ3권을 간행한 이후, 1988년에 4ㆍ5ㆍ6권, 1990년에 7ㆍ8ㆍ9권을 간행하여, 다음해 <만인보>로 중앙문화대상을 받았다. 1993년 <백두산> 연작을 완성하였고, 1999년 <머나먼 길>을 출판하였다.

   <피안감성>에서 <신언어의 마을>(1967)에 이르는 초기시는 주로 허무와 무상을 탐미적으로 노래한 반면, <문의 마을에 가서>를 발표한 이후부터는 어두운 시대상황과 맞물리면서 현실에 대한 치열한 참여의식과 역사의식으로 시 세계가 바뀌어갔다. 게다가 1980년 5월 이후부터 시작된 투옥, 고문, 연금은 그의 시에 커다란 영향을 주어 역사와 현실 참여를 노래하게 되었다. 그러나 영웅주의에 물들지 않고 진솔한 삶의 내면을 드러내 그만의 독특한 시 세계를 이루었다. 연작시 <만인보>로 시적 형상성을 얻은 뒤 장편서사시 <백두산>을 통해 더욱 빛을 발하였다.

 

【작품세계】

  서정주와 같이 '불교시'에서 시적 영감을 많이 얻고 있으나, 서정주의 인연설(因緣說)에 기초하지 않고 선(禪)적인 요소를 많이 갖추고 있다. 곧 서정주의 샤머니즘적인 면모를 뛰어 넘기 위해, 토속어를 많이 버리고, 오히려 생경한 서구어를 많이 사용, 실험하고 있다. 그는 현실 참여의식과 역사의식을 시를 통하여 형상화한 시인이다.

  그의 시는 자연이 내포하는 무의지의 율동에서 삶의 빛을 찾아내려는 노력과 의식의 객관화를 꾀하는 동시에 발랄하고 기발한 감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다 1970년대 이후부터는 허무의식을 곁들여져 있는 죽음에 관한 작품이 많다. 또한 자의식의 세계에서 벗어나 역사와 대면하면서부터 발표된 작품들은 불의의 현실에 대한 격렬한 투쟁의지를 담고 있다. 그는 폭력의 정치에 온몸으로 저항하면서도 참담한 현실에 절망하기보다 건강한 신념과 의지를 노래하고 있다. 그의 현실에 대한 폭과 깊이는 <만인보> 연작과 장시 <백두산>에 잘 드러나고 있으며 또한 민족의 삶과 진정성을 표현하고 있다.


  그의 초기 시들은 허무의 정서에 바탕을 두고 있다. 생에 대한 절망을 노래하면서 허무의 정서에서 젖어 있는 시적 자아의 형상에는 삶에 대한 의지나 집착보다는 언제나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하지만 죽음은 두려움의 대상이라기보다 심미적 탐닉의 대상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뿐만 아니라 이 시기의 시적 언어는 지나치게 탐미적이고 감상성을 벗어나지 못한 채 불안정한 정서의 편린을 표출하고 있다.

  그런데 그의 시세계는 1970년대 중반에 발간된 <문의마을에 가서>(1974) <입산>(1977)   <새벽길>(1978) 등을 통해서 변모된 모습을 보여준다. 이제 시적 자아는 자기 혐오나 허무감을 떨쳐 버리고  역사와 현실 앞에 자기를 세우기 시작한다.

  동시대에 대한 비판적인 안목과 민중 중심의 역사관에 바탕을 둔 이러한 자기 인식을 통해 시인은 정의롭지 못한 현재에 대한 격렬한 투쟁 의지를 노래한다. 대표작인 '화살'에서 잘 나타나듯이 투철한 현실에 바탕을 둔 자기희생의 비극성과  전투성이 이 시기의 주조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고은의 이러한 시적 변모는 이전의 시에서 볼 수 있었던 삶에 대한 회의적 태도가  생의 무상함에 대한 인식으로 변모하는 과정과 일치한다.  1980년 이들은 시인의 상상력을 통해 현실의 다면성을 그려내려는 시도라고 보여진다. 특히 연작시 <만인보>는 그 규모의 방대함과 시적 상상력의 포괄성에서 돋보이는 작품이다. 민족의 삶의 모습을 시간과 공간이 제약 없이 다채롭게 엮어가고 있는 이 시의 독특성은 반복과 중첩의 묘미에서 찾을 수 있다.

1. 삶의 고뇌, 참된 삶의 추구를 지향.

2. 자아와 세계에 대한 진지한 탐색과 여정(旅情)을 지적이고 상징적인 기법으로 제시함

 

【시】*<눈길>(1958) *<문의마을에 가서>(1974) *<화살>(1978) *<열매 몇 개>(1980) *<만인보>(1986-1990)

 

【시집】<피안감성(彼岸感性)>(1960.청익출판사) <해변의 운문집(韻文集)>(1962.신구문화사) <신ㆍ언어ㆍ최후의 마을>(1967) <새노야>(1970.신진문화사) *<문의 마을에 가서>(1974) <부활>(1974) <제주도>(1975) <입산>(1976.민음사) <새벽길>(1978) <아침 이슬>(1980) <고은시전집>(1983) <새벽길>(1984.창작과비평사) <조국의 별>(1984) <지상의 너와 나>(1985) <전원시편>(1986.민음사) <시여 날아가라>(1986.실천문학사) <백두산>(1987) <가야 할 사람>(1987) <전원시편>(1987) <너와 나의 황토>(1987) <네 눈동자>(1988)<시와 현실>(1987.실천문학사) <대륙>(1988) <잎은 피어 청산이 되네>(1988) <그날의 대행진>(1988) <눈물을 위하여>(1990.풀빛) *<만인보>(전9권.창작사.1990) <내일의 노래>(1992.창작과비평사) <남과 북>(2000)

 

【수필집】 <성(聖) 고은 에세이집>, <인간은 슬프려고 태어났다>

【장편소설】 <피안(彼岸)> *<화엄경>(1991) *<수미산>(1999)

【소설집】<피안앵(彼岸櫻)>(1962) <어린 나그네>(1974) <일식(日食)>(1974) <밤주막>(1977) <산산히 부서진 이름>(1977) <떠도는 사람>(1978) <산 넘어 산 넘어 벅찬 아픔이거라>(1980) <어떤 소년>(1984)

【전집】<고은시전집>(1983) <고은전집>(1988)

   -------------------------------------------------------------------------------------------------------------------------------

 

<민족문학의 기수 고은>

  해방 후 어느 날, 시집 <한하운 시초(詩抄)>를 습득, 밤새도록 읽고 가슴이 찢어질 듯한 문학적 충격을 받음. 전쟁 중에 호성(湖星)이란 호를 쓰며 시를 짓기 시작했고, 시를 모아 <아름다운 전설>이란 이름을 붙였으나 입산 당시 불살라 버렸다. 58년 시 <폐결핵>이 조지훈 등의 천거로 한국시인협회 기관지 [현대시]에 발표되어 등단. 이어 <봄밤의 말씀> <눈길> 등이 서정주의 추천으로 발표됨. 김관식(金冠植), 천상병(千祥炳)과 함께 문단 3괴(怪)로 불렸다. 60년 첫 시집 <피안 감성(彼岸感性)> 출간. [전후문협] 결성에 참가, 73년 박정희 정권 개헌 반대 운동의 첫 단계로 개헌 청원 운동에 문인 대표로 참가, 이때부터 허무주의의 대표자라는 딱지를 떼고 역사의식의 출발이 실현됨. 74년 자유실천문인협의회 결성에 참가, 초대 대표 간사로 활약했다. 민주 회복 국민회의에 문인 대표로 참여해 이때부터 경찰서, 정보부에 자주 불려갔다.


  고은 시인의 강서구 화곡동에 있던 낡은 단층 슬라브 주택을 흔히들 ‘화곡사’라 불렀던 것인데, 실은 늙은 총각의 엉성한 독신 살림 분위기가 그런 당호(堂號)에 걸맞았던 것이다. 더구나 고은 선생은 한때 강화도 전등사 주지다, 보은 법주사 주지다 하였고, 법명이 ‘일초(一超)‘이던 당대 선승(禪僧) 이었다.

  1974년 한 해의 문단 사정은 참으로 복잡 다단했었다. 정초의 연휴가 끝난 직후인 그해 1월 7일 유신헌법 개헌 운동을 지지하는 ‘문학인 61인 선언’을 발표하여 바로 다음날 긴급조치 1호와 2호를 발동케 했고, 서명 문인들 전원의 중앙정보부 초대만으로도 모자랐는지 세인을 깜짝 놀라게 한 ‘문인 간첩단 사건’이라는 것으로 이호철, 임헌영, 정을병, 김우종, 장백일씨를 줄줄이 엮어 갔었다.

  ‘민청학련(民靑學聯事件)’이라는 것이 터진 것도 그 해였고, 신문사의 일선 기자들이 자유언론수호 투쟁을 벌인 것도 그해였으며, 급기야 11월 11일에는 문단에서도 [자유실천문인협의회]가 발족됐었다.

  고은 선생이 생전 처음으로 자신의 집을 장만했던 것이 다난하기 그지없던 1974년 봄이었으니 그의 감회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었다. 그는 친구 화가의 곁방살이 또는 하숙생활 등의 떠돌뱅이로만 지내오다가 마흔두 살 나이에 ‘혼자만의 가정’이란 것을 최초로 갖게 된 것이었다.

  그는 민중문학이라는 이름의 ‘뿌리내리기’ 정착문화를 가지게 되었고, 재야 반체제 진영의 한 성주가 됐다. 스스로 ‘성(聖) 고은’이라 부르기도 했던 이 방랑자는 ‘속(俗) 고은’이 돼 치열한 리얼리스트로 ‘번신(飜身)‘을 한 것이었으니, 대단한 자기 혁명이 아닐 수 없었다. ’높이 오르는 새가 먼 곳을 본다‘는 따위의 문자가 있는데, 이에 빗댄다면 ’크게 절망해 본 사람이 깊은 데를 살핀다‘는 ’체험문학‘적인 이야기를 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1950년대의 허무와 1960년대의 광기의 세월에 고은 문학은 ‘허무주의의 맹장’, ‘질풍 노도의 선봉’이란 소리를 칭찬으로 듣기도 하고 비판으로 받기도 했다. 「절망의 찬란함」에 휘감겨 있었던 그는 이 세상의 어떤 종류의 권위주의도 부인하고 무슨 계통의 ‘공자 말씀’이든 매도해 마지않았다. 그의 절망이 워낙 크나큰 것이어서 희망의 언어란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자디잘게만 보인 때문이었다. 그는 수유리의 북한산에서 자살에 거의 성공할 뻔했었다. 주머니에 적지 않은 액수의 돈이 들어 있었던 탓으로 훈련 중인 예비군들이 그를 들쳐업어서 아랫마을의 병원에 운반해 주는 수고를 아끼지 않은 덕으로 요행히 살아났으니, 그의 표현대로 룸펜 프롤레타리아트이기보다는 룸펜 부르주아지였던 것이다.

  절망의 극에 다다르면 분명 희망의 순환 구조가 나타나게 마련 아닌가. 숨막힐 듯한 유신 독재하에서 가장 멍청한 시인이라도 절망을 노래하게 되는 분위기를 이루게 됐을 때 그는 일약 ‘절망의 진영’을 박차고 나와 민중 구원을 희원하는 불교 설화의 선재(善才) 동자(童子)와 같은 ‘절대 긍정’의 문예학과 사회변혁의 변증론을 찾아 낸 것이었다.

   --------------------------------------------------------------------------------------------------------------------------------

 

<나의 시가 걸어온 길> - 고은(시인)

  저는 시를 쓰지 않을 때에는 폐인에 가까운 존재가 됩니다. 때때로 세상에 대해 판단 정지 상태에 빠지기도 하고, 또 아주 멍청해져 버리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시 한 편이 나오면 눈이 번쩍거리고 뭔가 살아야겠다는 용솟음 같은 게 차오르곤 하죠. 시를 쓴 뒤에는 뭔가 멍해져서, 마음 속의 지평선을 막막하게 바라보곤 합니다.

  저는 지난 1년 동안 외국에 머무는 동안 너무 많은 이론의 숲 속에서 살았습니다. 저는 오늘 이 자리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詩學)'이라든지, 또 이후 정립되어 온 '시론(詩論)'이나 시에 대한 구구한 해석들에 대한 언급을 삼가고 싶습니다. 그보다는 1930년대쯤 아득하고 가난한 식민지 시대의 두메 마을 삼거리 주막의 늙은 주모가 역마살 탓에 기약 없이 출분한 아들을 애타게 기다리며 들려주는 하소연 같은 걸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요즈음 지식인이라든지 인문이라든지 사회라든지 하는 것 아닌, 온 몸으로 순박하게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정서가 제 가슴에 크게 울려오는 걸 느낍니다.

  우리는 오늘날 시는 물론 다른 모든 분야에서도 너무 많은 이론의 밀림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또 그런 이론을 필요로 합니다. 좀더 올바른 길을 가고 올바른 시야를 획득하기 위해서, 이론에서 여러 가지를 얻어 와야 합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삶이나 문화, 혹은 시에서, 이론은 모종의 장애가 될 때가 적지 않습니다. 여러분께서도 시와 이야기하고 시와 더불어서 세상을 좀더 엿볼 수 있는 기회를 모색하기 위해서는, 아무쪼록 이론보다는 여러분 가슴속의 시의 친구, 시의 연인, 시와 함께 오래 있어온 동행자들을 불러내 보기를 권합니다.

▶겉핥기식 이론이 아닌 가슴의 소리를

  저는 미국으로 초빙받아가 동부의 하버드대와 서부의 버클리대에서 강의를 했습니다. 강의를 시작할 때마다 저는 '시는 책 속에 들어 있지 않다. 시는 이론 속에 들어 있지 않다. 시는 여러분의 가슴속에 들어 있다. 나와 여러분이 만나는 시간은 가슴속에 들어있는 시를 꺼내서 시를 함께 나누고 싶어서 애타는 황홀한 그리움의 시간이다'라고 서두를 꺼냈습니다. 그랬더니 이론의 습관에 오래 젖어온 학생들은 '어, 저 사람이 이상한 소리를 한다'는 듯 눈알이 커지고 입이 벌어지더군요. 그래서 첫 시간은 그렇게 낯설게 지내지만, 차츰 내 심장이 그들의 심장에 닿고, 내 넋이 그들의 넋과 얽히면서 강의실 안이 뜨거운 열기로 가득 차가더군요. 학기말에는 헤어지는 것이 아쉬워 기념 촬영을 참 많이 했습니다.

  학문적인 것 혹은 과학적인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만, 시인이라면 모름지기 울음이 속 깊게 들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새가 노래한다'라고 하지 않고, '새가 운다'고 하지요. 돼지도 꿀꿀꿀 운다고 합니다. 그리고 봄밤의 소쩍새, 여름날의 뻐꾸기, 겨울날 기러기  들이 지나가면서 저 하늘 높이 떨어뜨리는 것, 우리는 그것을 '노래한다'든지 '소리를 낸다'고 표현하지 않고 '운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두고 1950년대의 전후 모더니스트들은 한국말은 왜 노래한다 하지 않고 왜 운다고 하느냐면서 문제를 제기했지요. 모더니즘의 시각에서 보면, 모국어의 이런 표현 형식은 엉터리이고 진부했겠지요.

  3년 전에 불란서에 가서 시 낭송을 할 때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한국에서는 노래한다는 말 대신 운다고 말한다. 모든 것이 운다. 따라서 나도 울지 않고는 못 견디겠다. 내 시도 울음이다.' 이렇게 얘기했더니, 그 말을 들은 청중들이 뭔가 무중력 상태로 떨어진 것 같은 충격을 받더군요. 특히 불란서 시인들은 그 말에 미쳐서 한국에서는 '운다고 하느냐. 운다고 하느냐'면서 크게 관심을 나타냈습니다. 모두 잘 알다시피 불란서 시인 하면 폴 발레리 등 아주 지적인 시를 쓰는 사람들인데, 운다는 말에 크게 감명을 받는 걸 보고 놀랐습니다.

  한자에도 울 명(鳴)자가 있습니다. 운다는 것은 단순히 아기가 배고플 때 운다든지, 첫사랑에 좌절을 맛보고 김소월의 시 세계처럼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하고 통곡하는 등 여러 가지 울음이 있습니다. 후르시초프 회상록에 보면, 독재자인 스탈린의 딸인 스베틀라나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병적인 독재자의 딸이 슬퍼하고 연민하는 걸 후르시초프가 건사하곤 했지요. 저는 그 회상록을 읽으면서 흐루시초프가 연민해 하면서 '숲 속에 가서 실컷 울고 오면 훨씬 나을 텐데, 울어야 할 숲조차 없구나' 하는 데서 크게 공감했습니다. 울음은 이처럼 인간의 맺히고 흐트러진 삶을 정화시켜 줍니다. 서양말로 한다면 '카타르시스'가 되겠지만, 우리 나라는 울음이 참 강한 민족입니다. 실컷 울고 나면 그 때 비로소 신세계가 만들어지지요. 피붙이 가운데 누가 원통하게 죽었거나, 찢어지는 아픔으로서의 사랑의 실패를 경험했거나 험악한 세상을 살아오면서 여러 가지 비애를 겪었을 때 사람들은 많이 웁니다.

  서양인들은 그것을 언어로 표현합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자신이 처한 극한 상황을 언어로 표현하기 이전에 그냥 울어 버립니다. 이런 정서는 우리가 그 동안 시를 쓰고 세상을 살아가는 데 대단히 약점으로 작용하기도 했습니다만, 돌이켜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런 울음이라고 하는 일종의 삶의 형식, 어떤 수행 방식 울음도 수행입니다. 공부입니다. 무슨 교회에 가서 기도하는 것, 절간에 가서 참선을 하는 것, 이런 것만이 수행이 아닙니다. 일상 생활을 해나가는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울음 자체가 아주 기가 막힌 우리 삶을 정화시키는 수행 행위입니다. 그렇게 울고 나면 새로운 세상으로의 출발이 가능합니다. 실컷 울고 나면 새로운 세상이 펼쳐져서 '아! 이 일상을 다시 가야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곤 하죠.

  울음에 대한 이런 근원적인 의미 부여와는 상관없이 나도 옛날에는 눈물이 쓸데없이 많았습니다. 5월인가 6월쯤 등꽃이 필 무렵 문학을 하는 친구의 하숙집을 찾아간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등꽃이 흐드러지게 마당에 피어 있고 확 달빛이 쏟아졌습니다. 그 달빛 때문에 새벽 3시까지 울었어요. 그 때는 통행금지가 있으니까 일찍 들어가 친구 집에서 술을 마셨지요. 처음에는 이 사람도 내 울음에 동조를 해서 '니가 우니까 나도 참 슬프다'면서 훌쩍거리기도 하고 술도 함께 마셨지요. 그런데 내가 폭포라도 쏟아져 나오듯 미치게 우니까, 나중에는 나에게 귀신들린 새끼라며 증오와 저주를 퍼붓기 시작하더군요. 그래도 나는 미쳐서 막 울었지요. 새벽 3시 반 정도까지 울고 나니까 울음이 다 말라 버리더군요.

  '클레오파트라 시대에는 로마에는 눈물단지가 있었다더라. 눈물을 흘릴 때면 다이아몬드나 보석처럼 흘려서, 우리도 눈물단지나 하나씩 만들자'며 마구 울었지요. 새벽 4시쯤 부우 하고 통행금지 해제 사이렌이 울리자, '우리 방에 귀신이 들어서 안 된다'고 추방해서 그 친구하고 10년 동안 절교한 적도 있습니다.

  이런 울음이 나한테는 오랫동안 있었어요. 지금도 조금씩은 있지만 울음이 10년씩 가다가 그 다음에는 불면증이 찾아오곤 했습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술을 마시면서 껄껄걸 웃으면서 얘기하곤 하는데, 전에는 전혀 이런 걸 용납하지 못했어요. 웃음은 위선자 아니면 생을 거짓으로 살고 있는 자들의 소유물이고, 사람들이 행복해 하고 웃고 하는 것은 속물들이나 하는 짓거리로 여겨져 이해를 안 했어요. 불면증이 10년이나 갔어요. 잠이 안 오니까 밤 12시쯤 되면 막소주를 김치를 안주 삼아 마시곤 했지요. 그 때 술이 취해 있으면 이 세상에 내가 최고의 시를 쓴 것 같았는데, 다음날 낮 2시쯤 깨어서 보면 가장 졸렬한 시였어요. 밤에 술에 취해서 과장이 되었다가, 다음날 낮이 되어 과장이 다 꺼지고 나면 처참한 패잔병처럼 남아 있는 게 내 작품인 걸 많이 겪었죠.

▶한 노동자의 의로운 죽음 앞에서

  이렇게 10년쯤의 세월을 보내다가 1970년의 어느 날 한 노동자의 죽음을 신문 기사에서 봤어요. 지금은 서울 무교동 골목의 낙지집들이 거의 없어졌지만, 그 때는 시뻘건 낙지에 곁들인 소주, 아주 맵고 짜고 독하고 이런 것만이 위안이 됐을 때지요. 통행 금지가 있을 때니까 술자리가 길어지면 술 탁자에서 자다가, 떨어지면 시멘트 바닥에 뻗어서 자곤 했습니다. 나중에 70년대, 80년대 들어 민주화 운동으로 조사 받으러 다니고 잡혀가서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재우고 할 때 그런 데서 훈련받은 게 도움이 되었어요. 좋은 침대에서만 잤더라면 7, 80년대를 겪어내는 데 좀 힘들었을 거에요. 그런 데서 인생을 막 굴렸기 때문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지요.

  70년대 한 노동자가 청계천에서 '일꾼들도 사람이다'는 말을 하면서 기름을 붓고 태워서 죽었는데, 그 때 나는 늘 내 죽음만 생각했어요. '내가 왜 이 세상에 태어났나, 나 같은 게 이 세상에 쓸모없이 태어났나, 나는 빨리 이 세상에서 끝나야 할 존재다'라는 둥 늘 죽음을 생각하고 실천하다가 실패하곤 했었죠. 그랬는데 그 때 이 노동자의 죽음이 신문에 났어요. 이 자가 죽었는데 뭐냐 하며, 내 죽음하고 견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슬슬 그 사람의 죽음에 들어가기 시작하면서, 그 죽음의 환경이 되어 있는 우리 현실이 확 나한테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내 불면증이 없어졌어요. 잘 자고 코도 잘 골고 다음날 아침 일어나는 등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60년대 초반 제주도에서 3년을 산 적이 있는데, 원래 그 때는 살러 간 게 아니고 제주도 바다에 빠져죽으러 갔다가 너무 취해서 죽는 걸 잊어 버렸어요. 가방 속의 큰돌에 로프를 묶어가지고 내 허리에 묶어서 저 깊이 심해로 들어가, 안 떠오르도록 하려 마음먹었지요. 제주해협이 그때처럼 호수처럼 거울처럼 된 적이 없었습니다. 파도가 부드러워진 걸 젠틀 웨이브(신사 파도)라고 하는데, 그보다 더 거울 같았습니다. 때마침 달은 비치고 미칠 것 같았습니다. 배 안의 매점에서 파는 술을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았고, 아무 명징한 이성만이 발달했습니다. 내가 죽음의 앞에 있으니까 술조차도 거절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니 바다의 공기가 좋아서 그렇게 취하지 않았다더군요. 계속 마셔댔는데 취하지 않고 결국 쓰러져 버렸지요. 부우 하는 뱃고동 소리에 깨어나 보니까 항구였습니다. 그래서 돌을 매고 죽는 건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그래서 3년 동안 불면증에 시달리며 제주에 살게 되었지요. 이런 이야기를 드리는 것은 다음에 읽어드릴 시의 배경의 일단을 알려드리기 위해서입니다.

  70년대를 지나면서 옛날의 나와 전혀 다른 삶을 살기 시작해 80년대까지 이어지다가, 90년대에 들어서 그 두 가지 다른 방법을 종합해서 다른 시세계를 지향하려는 시점에 와 있습니다.

  그 동안 여러 세상을 다니기도 하고 여러 유혹도 있었습니다만, 나는 내 조국의 기호로서 살고 있다는 것은 양보할 수 없는 나의 운명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우리 모국어는 참으로 심란스러운 고민을 안고 있습니다. 영어를 공용어로 채택하자는 주장에 이어, 심지어는 우리말을 없애 버리고 영어만을 쓰자는 주장도 나오고 있습니다. 얼마나 저러면 저런 주장들이 나왔겠는가 이해를 하는 편입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 세계가 열려진 상태일수록 우리 민족의 실체를 유지해준 우리 모국어는 꼭 지켜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는 세상이 어떻게 달라지더라도 우리 모국어를 지키는 한 전사가 될 생각입니다.

  우리말 없이는 세상과 만날 수 없습니다. 세계화는 결코 단일한 구조로 되어 있지 않습니다. 인터넷을 통해서 세계를 하나로 만들려 하고 있습니다만, 그럴수록 우리는 우리의 것을 가져야 됩니다. 세상은 여러 민족, 다른 성, 다른 얼굴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다(多)'라고 하는 것은 하나하나가 살아 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도 다문화 정책을 쓰지 않습니까. 이런 때 우리 것을 아무 것도 갖고 있지 않다면, 민족 이하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고 맙니다.

  미국의 동부, 혹은 뉴욕에서 한국 사람이 한국 문화를 그들에게 설명하지 못하면, 제대로 된 대접을 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 교포들이 어려운 일,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고 일해서 의사도 많이 배출하고 부자들도 많이 나왔습니다만, 이 점에서는 철저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중국인, 일본인들은 우리와 달리 그들의 문화를 서구 사회에서 드높이 펼쳐 나갑니다. 문화 없이는 넓은 세상에 나가서 행세할 수 없습니다. 이런 도구로서도 우리의 모국어와 문화를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 큰 임무가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시는 현실과 허구의 직조로

  졸시 '폐결핵'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이 시는 도스토예프스키를 좋아하던 화가 친구에게 준 것입니다. 이십대에 이미 조선일보사의 현대작가 초대전에도 초대받은 친군데, 그가 막 출범한 현대시인협회에 보낸 것입니다.


누님이 와서 이마맡에 앉고,

외로운 파스․하이드라짓드 병 속에

들어 있는 정서(情緖)를 보고 있다.

뜨락의 목련이 쪼개어지고 있다

한번의 긴 호흡이 창의 하늘로 삭아 가버린다.

오늘 하루의 이 오후에

늑골(肋骨)에서 두근거리는 체온의 되풀이

머나먼 곳으로 간다

지금은 틀거울에 담긴 기도와

소름 끼는 아래얼굴,

모든 것은 이렇게 두려웁고나.

기침은 누님의 간음(姦淫),

언제나 실크빛 연애나

나의 시달리는 홑이불의 일요일(日曜日)을

누님이 보고 있다

누님이 치마 끝을 매만지며

화장(化粧) 얼굴의 땀을 닦아 내린다


  이 시는 현실과 허구 그 어느 것에도 속하지 않는 작품입니다. 말하자면 현실과 허구가 서로 섞여 버린 것이죠. 그리스 신화에서는, 신화가 저도 모르게 역사로 돌아오고 역사인가 하면 다시 신화의 세계로 가는 걸 봅니다. 다른 나라의 상고사를 보면 어느 날은 전설이었다가, 다시 역사로 오고 하는 걸 봅니다. 현실과 허구가 분화되지 않은 어떤 미칠 듯한 애매몽롱한 아주 불확실한 상태죠. 우리가 세상살이를 해나갈 때는 대체로 이분화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꿈꾸는 허구는 따로 있고,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은 지금 진행되고 있고 이렇죠.

  이 시는 허구이자 또 하나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저는 폐결핵에 걸린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60년대까지만 해도 폐결핵이라면 민법상 장가 가고 시집갈 자격도 없는 병이었습니다. 그렇게 무서운 민법상의 질병이었습니다. 그런데 새벽에 기침하는 소리가 좋았습니다.

  평론가들 사이에 '고은의 누이 콤플렉스'라는 말이 오갔습니다만 그것은 거짓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오십이 넘어서 건강 진단을 해보았는데, 그때 비로소 한쪽 폐가 없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떠돌고 술만 먹고 하는 사이에 폐결핵이 찾아왔다가 떠나 버린 거지요. 그런 걸 보면 내가 염원하던 허구, 그것이 나중에 현실로 된 것입니다. 한 시인의 꿈이 냉엄한 현실로 진행된 거지요. 이것이 곧 문학을 이해하는 비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다음으로 제주도 시대의 '묘지송(墓地頌)'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저는 참 무덤을 좋아했습니다. 어느 곳이든 가면 그곳의 무덤을 세어 보곤 합니다. 이것은 제주도 사라봉 공동묘지를 배경으로 씌어진 시입니다. 중앙의 잡지에 발표되면 그것으로 한 달을 위안을 받고 살던 시절, 시인 김수영이 좋다고 사신을 보내오기도 했지요.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데 그대 자손은 차례차례로 오리라.

지난 밤 모든 벌레 울음 뒤에 하나만 남고 얼마나 밤을 어둡게 하였던가.

가을 아침 재보(財寶)인 이슬을 말리며 그대들은 잔다.

햇빛이 더 멀리서 내려와 잔디 끝은 희게 바래고

올 이른 봄 할미꽃 자리 가까이 며칠만의 산국화가 모여 피어 있구나.


그대들이 지켰던 것은 비슷비슷하게 사라지고 몇 군데의 묘비(墓碑)는 놀라면서 산다.

그대들이 살았던 이 세상에는 그대의 뼈가 까마귀 깃처럼 운다 하더라도

이 가을 진정한 슬픈 일은 아니리라.

오직 살아 있는 남자에게만

가을은 집 없는 산길을 헤매이게 한다


그대들은 이 세상을 마치고 작은 제일(祭日) 하나를 남겼을 뿐

옛날은 이 세상에 없고 그대들이 옛날을 이루고 있다.

어쩌다, 잘못인지 노랑나비가 낮게 날아가며

이 가을 한 무덤 위에서 자꾸만 저 하늘에 뒤가 있다고 일러준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데 그대들은 이 무덤에 있을 뿐 그대 자손은 곧 오리라


  인생 자체가 돌아보면 어리석고 유치합니다. 그러나 또 돌아오면 치졸하고 졸렬했다고 생각하면서 후회 몇 번 하면 끝나 버리기 십상이죠. 제주도에 가서 뭔가 획 트이는 기분을 느꼈습니다. 그걸 개안(開眼)이라고 하죠. 그 개안이 좀 있었는데, 지금 보면 졸렬합니다. 그게 내 시로서는 한 단계를 올라선 것 같습니다.

  오랜만에 여러분 앞에서 시에 대해 진지하고 보편적인 것을 말하고 싶지만, 그것보다는 제 개인을 통해서 어떻게 굴절하고 어떻게 변모되고 이끌어져 왔는가를 얘기함으로써 여러분에게 시의 구체성이 다가가기 바랍니다. 제가 아까 이론을 거부한 이유가 이것이죠. 그때 죽으러 제주도에 갔는데, 구 죽음이 새로 삶을 살게 해준 은총을 받았죠. 그래서 <해변의 운문집>과 <제주가집>이라는 두 권의 시집을 냈습니다. 이야기에는 거짓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시에는 진실이 있습니다. (중략)

  그리고 3년 살고 서울에 왔습니다. 제주도 체험을 통해서 언어를 희화화시켜 보곤 했습니다. 우리가 천천히 살아가면서 변화시켜온 언어라는 습관 자체가 우리를 얼마나 살려주고 있는가를 알았습니다. 임진왜란 이전의 언어와 그 후의 언어는 크게 다릅니다. 지극히 부드러웠던 언어가 임진왜란이라는 격렬한 전쟁을 치름으로 인해서, 언어가 아주 세게 바꿔집니다. 백년 후의 언어는 분명히 오늘과 크게 달라질 것입니다. 현대문학 초창기의 현진건, 나도향 등의 언어는 지금 읽어보면 지루하기마저 하지만, 곰곰이 돌아보면 언어의 맛이 살아 있음을 느낍니다.

  서울로 와서 새로 지은 시 '종로'는 이렇습니다.


나 여기 한동안 어이할 수 없이 서 있노라

모든 지나가는 것들아 비탄 한 꾸러미씩 매판 한 꾸러미씩 사가지고 가는 것들아

현실 궤멸하라 현길 궤멸하라

나 여기 한동안 서 있노라

모든 딱한 것들아 내 가슴에 한국 청산가리를 칠하고

펄쩍펄쩍 날뛰는 아픔으로

백년 이래의 온갖 한을 불태우노라

나 여기 한동안 어이할 수 없이 서 있노라

다 지나가 버리고 문짝들이 저마다 사리사욕 닫혀 버리고

마도의 향불 내오나 내오나

이윽고 너도 꺼지고

내 빈 대머리로 종로 인경을 치노라

밤새도록 점잖은 것들아

무지몽매야 전압 덩어리 서해 복판 이르기까지

울부짖는 인경 밑에 내 흰 뇌수를 뿌리노라 꽂히노라

현실 궤멸하라 현실 궤멸하라


  심훈의 '그날이 오면'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해방이 되면 모든 것을 종로 인경에 부딪치겠다'는 이미지가 여기에 담겼는지 모르겠습니다. 옥스퍼드 시학 교수 바우라가 '시와 정치'라는 책을 통해 알렸지요. 나는 종로에 와서 현실을 감당할 수 없고, 뭔가 고쳐야 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니힐'(허무)이라는 게 있었습니다. 제 경우는 전쟁 세대로 절반밖에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원죄의식이 있지요. 친구들의 죽음 덕분에 살아남은 존재라는 것이지요.

저는 돌아보면 폐허의 자식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실존적인 허무가 좋아서 60년대적인 허무를 간직하고 살다가 70년 벽두 전태일 열사의 죽음으로 인해서 그것이 깨어져 버렸습니다.  70년대에 쓴 '문의마을에 가서'를 읽는 것으로 마치겠습니다.


겨울 문의에 가서 보았다.

거기까지 다다른 길이 몇 갈래의 길과 가까스로 만나는 것을

죽음은 죽음만큼 이 세상이 길이 신성하기를 바란다

마른 소리로 한번씩 귀를 닦고

길은 저마다 추운 소백산맥쪽으로 뻗는구나

그러나 빈부에 젖은 섦은 길에서 돌아가

잠든 마을에 재를 날리고

문득 팔짱 끼고 서서 참으면

먼 산이 너무 가깝구나

눈이여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느냐

겨울 문의에 가서 보았다

죽음이 삶을 꽉 껴안은 채

한 죽음을 무덤으로 받는 것을

끝까지 참다 참다 죽음은 이 세상의 인기척을 듣고

저만큼 가서 뒤를 돌아다본다

지난 여름의 부용꽃인 듯

준엄한 그 무엇인 듯

모든 것은 낮아서 이 세상에 눈이 내리고

아무리 돌을 던져도 죽음에 맞지 않는다

겨울 문의여 너의 죽음을 덮고 나면

우리 모두 다 덮이겠느냐

 

출처 : 碧 空 無 限
글쓴이 : 언덕에서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