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모음

자꾸만 장구가 되어가던 쌀통 / 상희구

시치 2009. 5. 5. 00:11

자꾸만 장구가 되어가던 쌀통 / 상희구

 


대구 칠성동
단칸방 시절
큼지막한 손아귀 둘이 포개져서 악수하는
그림 위로 글귀도 선명한 UNKRA 유엔한국재건단의
커다란 원통형 분유통을 우리 집 쌀통으로 썼는데
쌀이나 보리가 그득할 때는 도무지 쌀통이란 것이
둔중하고 묵직해서 한 됫박을 퍼내도 그만
한 말을 퍼내도 그만이어서 소리가 나지 않았다.

 

내용물이 점점 줄어들어 속이 비게 되면
이 쌀통은 큰 울림통의 장구처럼 되어 마침내 울기 시작한다.
어느 늦은 봄날 이었던가
신새벽, 몰래 일어나신 엄마가 바닥을
들어내기 시작한 쌀통을 긁자 쌀통이
버어억― 버어억 울었다.

 

“아이고 이 새끼들 우짜꼬”
“아이고 이 새끼들 우짜꼬”

 

엄마가 숨 끊어진 다음의 자투리같은
끓는 소리로 내 뱉었다.

 

나는 그때부터 새벽잠이 없어졌다.

 

장구든 북이든 쌀통이든
속을 비우면 다 우는가보다.

 

계간 시향 (2006년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