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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익은 탑 -이하석

시치 2009. 4. 30. 01:08

 

 

익은 탑 -이하석


  탑이 쌓이건 무너지건 도로변 흥정은 자주 유쾌하다

  무너지면 포도 위 나딩구는 사과들까지 날렵하게 주워 

  할머니는 매번 정성들여 다시 쌓는다


  상원사 폐탑 사진을 내 방의 책상 위에 세워두었지만

  그건 그것이고,

  푸성귀와 함께 길가에 늘어놓고 사과 한 상자를 종일 앉아서 파는 할머니는 고운 탑을 하루에도 수백 번 우리 동네 앞 길가에 쌓는다


  제일 아래층은 다섯 개,

  그 윗층은 세 개,

  그 위 꼭대기층은 한 개로

  한결같이 가지런하게 쌓여지는 삼층탑들


  폐탑이란 있을 수 없는 저 탑의 높이는 가장 맛있는 높이

  어느 누구도 올려다볼 수 없어 아이들까지도 내려다보는,

  그 높이가 아주 낮아도 거룩하게 까마득해 할머니가 내내 그윽해하는,

  황혼 어른댈 녘이면 없어졌다가 아침 해 그림자 짧을 때 쯤 늘 새로 나타나세워지는

  우리 동네의 싱싱한 거리탑들  

 

      -『현대문학』2006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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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대 오대산 상원사에 가 보았는가? 그곳 영산전 앞에 있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석탑을 보았는지. 탑이 무너져 내린 그 막돌들을 그냥 대충 쌓아올린 상원사 페탑이 내뿜는 향기를 가슴에 담아보았는지. 대구 가창골에 살고 있는 이하석 시인은 동네 앞 길가에서 ‘익은 탑’을 발견한다. 무생물인 탑이 익다니, 무슨 말인가? “푸성귀와 함께 길가에 늘어놓고 사과 한 상자를 종일 앉아서 파는 할머니”가 세운 탑이라 “제일 아래층은 다섯 개,/그 윗층은 세 개,/그 위 꼭대기층은 한 개로/한결같이 가지런하게 쌓여지는 삼층탑들”이다. 그 탑이 무너지면 매번 할머니가 정성들여 다시 쌓으니 “폐탑이란 있을 수 없는”것이고 또 “어느 누구도 올려다볼 수 없어 아이들까지도 내려다보는,/그 높이가 아주 낮아도 거룩하게 까마득해 할머니가 내내 그윽해하는” 탑이다. 독자여, 저 잘 익은, 싱싱한 거리탑들을 검은 비닐 봉지에 담아 집에 옮겨놓으시라. 그러면 가족들의 얼굴에 웃음꽃 활짝 피고 또 피어날 테니. 언어를 펼치고 포개어 이렇게 익은 탑을 세상에 전파하는 시인 이하석은 어떤 사람일까?

-이종암(시인)

 

[경북매일신문] 2월 25일(수)

 

 

 

 

출처 : 윤경재
글쓴이 : 화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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