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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붉은 혀 (외 2편) / 권혁재
시치
2009. 4. 28. 03:26
붉은 혀 (외 2편)
권혁재
입 속에 갇힌 혀들이 거리로 나와
표정이 없는 위정자의 말처럼
무뚝뚝하게 걸어다녔지
침묵이 조장하는 거짓과
반질거리는 비리가 난무하는
피둥피둥한 노란 몸뚱아리에
입술을 적시는 침은 남아 있지 않았지
믿음이 부재한 디지털의 도시에서
집단으로 내미는 붉은 혀
죽음은 있는데 범인이 없는
괴상망측한 시대에, 나도 공범이 되어
붉은 혀가 득실거리는 블랙홀로
손을 집어넣을지도 몰라
알코올에 마비가 된 한 치의 혀가
말들이 휘청거리는 밤거리에서
욕설을 내뱉었지
그렇게 우리는 모두 단독범행을 저지르면서
공범이 되어 가고 있었지
붉은 혀를 불쑥불쑥 내밀면서.
----------------------------------------------------
투명인간
아내와의 잠자리에서도
나는 없다
눈 뜨면 나갔다 해 지면 돌아오는
나의 집에도 나는 없다
어쩌다 성원이 된 모처럼의
가족들간의 식사에서도
나는 없다
아들 녀석도 딸년도 없다
숟가락 젓가락만 은빛으로 흔들릴 뿐
보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집에서건 직장에서건
늘 나는 제 위치에 있는데
나를 보는 얼굴은 누구도 없다
제대로 된 눈길 한번 맞춰주지 않는
불투명한 땅덩어리의 투명한 기도
거기에도 나는 없다
아무도 보는 눈길들이 없는 곳에서
오늘도 나는 혼자 밥을 꾸역꾸역 먹는다
물방울처럼 그렇게 나는 증발되고 있다.
--------------------------------------------------
밀물
아랫도리가 벗겨진 포구
진흙에 감춰진 엉덩이의 곡선이
스물스물 흔들리었다
등대의 불빛에 따라
하얀 긴 혀를 낼름거리며
사타구니로 점점 기어오르는
부드럽고 따뜻한 키스
아랫배에 힘이 들어갔다
마음놓고 교성 한번
제대로 지르지 못했는데
포구에는 벌써 물이 차올랐다
물길을 좇아 온 실한 장어 떼들이
갯벌에 머리를 쑤셔 박고서야
물은 더 이상 차오르지 않았다
희열이 묻힌 엄숙한 고요
뒤엉킨 사랑이 제자리 찾아
아랫도리를 주워다 입었을 때,
물새소리로 흐느끼는 포구에게
해풍이 눈치 없이 불어 갔다.
----------------------
권혁재 / 1965년 경기도 평택 출생. 단국대학교 국문학과와 같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박사과정 수료. 2004년 〈서울신문〉신춘문예에 「토우(土雨)」당선. 시집 『투명인간』.
권혁재
입 속에 갇힌 혀들이 거리로 나와
표정이 없는 위정자의 말처럼
무뚝뚝하게 걸어다녔지
침묵이 조장하는 거짓과
반질거리는 비리가 난무하는
피둥피둥한 노란 몸뚱아리에
입술을 적시는 침은 남아 있지 않았지
믿음이 부재한 디지털의 도시에서
집단으로 내미는 붉은 혀
죽음은 있는데 범인이 없는
괴상망측한 시대에, 나도 공범이 되어
붉은 혀가 득실거리는 블랙홀로
손을 집어넣을지도 몰라
알코올에 마비가 된 한 치의 혀가
말들이 휘청거리는 밤거리에서
욕설을 내뱉었지
그렇게 우리는 모두 단독범행을 저지르면서
공범이 되어 가고 있었지
붉은 혀를 불쑥불쑥 내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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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인간
아내와의 잠자리에서도
나는 없다
눈 뜨면 나갔다 해 지면 돌아오는
나의 집에도 나는 없다
어쩌다 성원이 된 모처럼의
가족들간의 식사에서도
나는 없다
아들 녀석도 딸년도 없다
숟가락 젓가락만 은빛으로 흔들릴 뿐
보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집에서건 직장에서건
늘 나는 제 위치에 있는데
나를 보는 얼굴은 누구도 없다
제대로 된 눈길 한번 맞춰주지 않는
불투명한 땅덩어리의 투명한 기도
거기에도 나는 없다
아무도 보는 눈길들이 없는 곳에서
오늘도 나는 혼자 밥을 꾸역꾸역 먹는다
물방울처럼 그렇게 나는 증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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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
아랫도리가 벗겨진 포구
진흙에 감춰진 엉덩이의 곡선이
스물스물 흔들리었다
등대의 불빛에 따라
하얀 긴 혀를 낼름거리며
사타구니로 점점 기어오르는
부드럽고 따뜻한 키스
아랫배에 힘이 들어갔다
마음놓고 교성 한번
제대로 지르지 못했는데
포구에는 벌써 물이 차올랐다
물길을 좇아 온 실한 장어 떼들이
갯벌에 머리를 쑤셔 박고서야
물은 더 이상 차오르지 않았다
희열이 묻힌 엄숙한 고요
뒤엉킨 사랑이 제자리 찾아
아랫도리를 주워다 입었을 때,
물새소리로 흐느끼는 포구에게
해풍이 눈치 없이 불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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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혁재 / 1965년 경기도 평택 출생. 단국대학교 국문학과와 같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박사과정 수료. 2004년 〈서울신문〉신춘문예에 「토우(土雨)」당선. 시집 『투명인간』.
출처 : 푸른 시의 방
글쓴이 : 강인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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